[이은화 시인의 작가 초대석 ] “시는 언어의 보석, 그 속에서 빛나는 건 시인의 영혼” - 강인한 시인과의 만남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8-07 13: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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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이은화
대담자: 강인한
▲ 강인한 시인

[편집자 주]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이리중앙초등학교 졸업. 정읍중학교 졸업. 전주고등학교 졸업.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로 등단. 시집 『이상기후』 『불꽃』 『전라도 시인』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푸른 심연』 『입술』 『강변북로』 『튤립이 보내온 것들』 『두 개의 인상』 『장미열차』,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신들의 놀이터』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 『백록시화』. 1966년 3월~1977년 2월, 정읍 호남고등학교 교사. 1977년 3월~2004년 2월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교사로 명예퇴직. 수상 경력: 1982년 시집 『전라도 시인』 전남문학상, 2010년 시집 『입술』 한국시인협회상, 2017년 『튤립이 보내온 것들』 시와시학시인상, 2020년 시집 『두 개의 인상』 전봉건문학상.


● 2002년 3월부터 2025년 8월 현재까지 한국 현대시의 참되고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하여 인터넷 카페 《푸른 시의 방》을 독자적으로 공개 운영하는 데에 날마다 온힘을 기울이고 계시는 강인한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먼저 우리 시단의 중진이신 선생님을 이달의 초대석에 모시게 되어 기쁘고 영광입니다. 그 동안 카페의 좋은 시 읽기에 1만4천여 편을 소개하고 가입한 정회원은 4천여 명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시단에서 선생님을 시인들의 스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시단에서 스승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보다 어느 날인가 내 나름 시론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문학 중 가장 단단하며 보석처럼 빛나는 건 시며, 그 시를 일궈내는 시인의 정신은 투철하고 미학적으로도 완벽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오랜 궁구 끝에 두 개의 문장으로 정리해봤습니다.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


● 한때 패기에 찬 시인들 중에서 연세 들면서 시에 긴장이 떨어지며, 작품 활동도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게 우리 시단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보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요즘도 젊은 친구들과 비슷할 만큼 왕성하게 힘 있는 작품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 나는 매일같이 눈을 뜨면 서재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카페 《푸른 시의 방》에 들어가 작업을 하는 게 루틴이 됐습니다. 카페 작업실에 준비한 ‘좋은 시 읽기’와 ‘비평/에세이’에 시 한두 편, 신문 잡지에 나온 시 감상을 한 꼭지 골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게 일입니다.


● 요즘 시 쓰는 친구들 가운데 이 카페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잘 보면 시의 갖가지 경향을 가리지 않고 올리시더군요. 잡지에 발표되는 시, 시집으로 나온 시, 서정적인 시, 주지적인 시, 전위적인 시, 난해한 전위의 시 등등을 구분하여 작업을 도와주는 분이 몇 분이나….

▼ 아닙니다. 나 혼자 일합니다. 웹진의 시들 복사도 가능한 게 있지만 더러는 복사, 스크랩 금지로 설정돼서 백지를 꺼내어 손으로 베껴 쓰기도 합니다.


● 그럼 많이 힘들 텐데요.

▼ 그게 일상적이기 때문에 고역이란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손으로 읽는다고 할까, 눈으로 읽는 것과 달리 텍스트의 시가 손끝으로 정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시 전문을 손으로 베껴 쓰고 나서 헛수고를 했다는 후회와 함께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날마다 하는 내 일이 결국 나 스스로 시의 현장을 생활하는 셈으로 비록 80대지만 젊은 시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거죠. 졸시 「강변북로」를 쓴 게 내 나이 67세(2011) 때입니다. 그 해 《유심》 5/6월호에 발표했고.


강변북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 요즘 이야기 말고,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년시절이나 사춘기 시절의 옛 이야기 등이요.

▼ 6.25 한국전쟁이 터질 때 아버진 이리세무서장이셨습니다. 잠시 김제 만경으로 피란 갔을 때 붙들려 아버진 전주형무소에 갇혀 지내셨습니다. 그때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전통을 잘못 듣고, 형무소 문을 잠시 열어준 5분 내지 10분 사이의 시간에 아버지는 무작정 맨발로 뛰쳐나왔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맨발로 달아나온 한참 뒤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고…. 석방된다는 말에 입었던 옷가지며 신발을 찾느라 이리저리 행동이 굼뜬 이들이 전통을 재확인한 그들의 총에 모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가고 있었지./먼 데 개 짖는 소리 속으로……전라도여, 전라도여/발길질에 채이고 피 흘리다가/ 밤을 도와 달아나온 내 아버지여-「전라도여, 전라도여 Ⅲ부 중에서, 시집 『전라도 시인』 1982) 소설가 하근찬 선생의 부친도 그 전주형무소에서 갇혔으나 그 시신을 제대로 찾지 못하였다는 이야길 훗날 윤흥길 작가에게서 전해들은 적 있습니다.


●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한국전쟁에 묻어있는 걸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지요.

▼ 그 후 휴전이 되고 정리가 되면서 우리 아버지는 광주사세청(현 국세청) 조사과장으로 복직하셨습니다.
2학년 봄부터 《새벗》 《소년시대》 같은 잡지며 소파 방정환 선생의 『사랑의 선물』이며 『암굴왕(몬테크리스트 백작)』 『윌리엄 텔』 『삼총사』 『하므레트(햄릿)』 등 아버지가 사다주신 책들을 열심히 읽었어요. 곰곰 생각해보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3,4년 정도 기간의 독서가 내 문학의 꿈을 싹틔워준 것 같습니다.
 

▲ 2019년 이집트 호루스신전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 선생님 어린 시절 가족들과의 이야기도 궁금하군요.

▼ 맨 위로 누나가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그 아래 형, 그리고 내가 막내였습니다. 아마 그 시절 누나는 사범학교를 나온 햇병아리 선생님이었을 겁니다. 대성초등학교에 무용 담당 교사였는데 어느 일요일엔가 나를 데리고 동료 선생님이랑 음악실을 구경시킨 적 있었어요. 까만 피아노를 본 게 그게 처음일 것 같습니다. 피아노 뚜껑에 붙인 표어가 생각나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누나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어린 왕자

내 어린 날의 몽당 크레용을 주세요.
까슬까슬한 흰빛 도화지에 나는 그리고 싶어요.
밤 검은 산에서 혼자 돌아오던
아홉 살의 보랏빛 산길을
비 갠 날 거미줄에 걸리어 잉잉거리던
방울 무지개와
연잎에 돌돌거리는 누나 고운 눈빛이랑
등나무 아래로 등나무 아래로 어룽지던 연둣빛
일요일의 심심한 하모니카 소리도 그리고 싶어요.
내 어린 날의 색종이를 주세요.
불쌍한 네로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의
그 붉은 풍차를 오려 붙이겠어요.
바람 부는 날 팔랑거리는 옥색 대님도
내 손바닥을 간질이던 눈 까만 강아지 이름도
인젠 다 기억 할 수가 있어요.
소아과 병원에 끌려 들어가면
싸하니 밀려오는 하얀 병원 냄새
뺨 비빌 때 콕콕 찌르던 아버지의 턱수염도
안 잊혀요, 영영 안 잊혀요.
내 어린 날의 몽당연필을 주세요.
나는 적고 싶어요.
양지바른 골목길을 졸랑졸랑 달려오는
기쁜 발소리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이는 사, 이삼은 육
등에 멘 책가방 속에서
잠자리표 연필이 꽃구슬과 만나는 소리
곱셈과 나눗셈이 밤늦도록 소곤거리는 소리를.
내 어린 날의 좋은 기억을 주세요.
그 어려운 병이래도 좋아요, 아주 다 주세요.

(1970년 작. 시집 『불꽃』 1974)


● 선생님, 중고등학교 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들려주셔요.

▼ 우리 땐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필기시험 치르고 구두시험 면접이 있었지요. 면접 담당 두 분 선생님 중 한 분이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지 그 이름을 말해 보아라.” 훗날 친구들 이야길 듣고 보니 나도 그런 인물을 택할 걸 하고 후회스러웠지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 선생…. “저는 알렉산더 뒤마를 존경합니다.” 뜻밖의 대답을 들은 듯 다른 분 선생님이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삼총사』 『암굴왕』을 쓴 사람이 알렉산더 뒤마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성균관대학교 주최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 참가해서 받은 시제는 ‘오늘’이었습니다. “오는 날을 위한 꽃/ 꽃다움은/ 공명할 수 없는 항아리/ 속으로 지는/ 잎새.// 지난날을 잊기 어려워/ 차마/버릴 수 없는/ 곳/그 점을 두고/ 까악/까악/ 우짖는 갈가마귀.// ―배앵 돌다/ 아래로 떨어진다,// 아아, 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날개를 퍼덕이다/가루 된/ 심장.// 나갈 수 없는/ 구멍으로/ 바람/ 불어와// 오는 날을 앗아가는/ 항아리 안/벽.” 생각지도 않게 내가 써낸 이 시가 장원으로 뽑혀 상을 받았다는 게 꿈만 같았습니다. 문예반 지도 선생님이신 신석정 선생님이 떠올랐고 갑자기 목이 메어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 강인한 선생님의 대표작이 될 만한 시 몇 편을 꼽아보시고, 간단한 감상 안내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빈 손의 기억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현대시학》 2005년 10월호

▼ 내가 꼽아보는 다섯 편.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는 현대 프랑스 문명과 3천 년 전 이집트 문명과의 조우를 가상하여 쓴 시. 「강변북로」는 오욕의 역사가 강물처럼 흐르는 가운데 상처받은 국민들과 비극의 희생이 된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빈 손의 기억」은 강변에서 물수제비뜨는 장면을 역동적인 이미지와 감각적 표현을 구사한 시. 「검은 달이 꿰어 올린 강물 속에」는 삼국유사에서 끄집어 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통해 비극적 현실을 초현실적 기법의 그림으로 표현한 시. 「1965」는 비운의 1965년 한일협정을 월남파병의 표면적인 사건에 묻고, 행간에 국민적 통한의 억눌린 감정을 반복적 리듬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


오늘 강인한 선생님과의 대담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라는 말씀이 깊이 와닿습니다. 이 한 문장 안에 선생님의 문학관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80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23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푸른 시의 방》을 운영해 오신 열정입니다. 복사가 안 되는 시를 손으로 직접 베껴 쓰시면서도 “손으로 읽는다”고 표현하신 말씀에서, 시에 대한 선생님의 진정한 사랑과 헌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6.25 전쟁의 비극적 체험, 문학 소년 시절의 순수한 꿈,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창작 의지까지. 선생님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시인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매일 좋은 시를 발굴하고 소개하며 우리 시단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오신 선생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어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시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이은화 시인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일요주간 문화예술 전문 주필위원.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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