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길목에서] 양은진 ‘바쁘다는 핑계’

시인 양은진 / 기사승인 : 2018-05-02 11: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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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선택해야”
▲ 시인 양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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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능우먼이 아니어도 벅찬 하루


당신은 몇 개의 명함을 가지고 살까요? 우리는 평균 몇 개의 명함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 번째 명함이었던 치과의사는 학창시절 내내 가장 오랫동안 준비했던 본업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일주일에 몇 시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전문직이라는 그 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내고 있는 위치로는 아들 둘을 돌보는 엄마이자 학습 매니저!


아무리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도 남편 눈에는 부족하기만 한 며느리, 잘 키워서 결혼해서 독립했지만 속상한 집안 일이 있을 때마다 쪼로록 전화해서 걱정시키는 딸, 생활의 발이 된 차를 고치고 검사하는 일부터 남편에게 필요한 서류를 끊는 소소한 심부름까지 삶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해줘야하는 남편의 비서노릇까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결혼한 30~50대 성인이라면 아마도 이정도 명함은 가지고 있으리라.


360도로 삶을 나누어도 1도, 2도 각 각의 도수마다 촘촘하게 역할의 짐을 지고 있는 현대인 혹은 우리네 부모님들은 몸에 착 붙어버린 습관이 되어 젊어서는 일에 치여 살고 60대 이후에도 손에서 일을 놓치 못하게 한다.


젊어서는 일중독자 라는 단어를 끼고 살고 나이 먹어서는 그 일 없으면 금방 늙는다거나, 심심하다는 핑계아래 손을 놓지 못하는 판국이다.


●일곱 살짜리 유치원생도 바쁜데?


언젠가 한번은 종종거리며 바쁘다는 푸념 속에 생활의 곤궁함을 토로했더니 그 분은 “우리나라에 살면서 안 바쁜 사람이 없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일곱 살짜리 유치원생도 바쁜데 어디서 어린양이냐?” 시며 톡톡히 혼을 내셨다.


그 당시 아들이 유치원생이었기에 그 말씀에 깨달음이 있었다. 일하는 엄마를 둔 다른 집 아이들과 같이 선택의 여지없이 아무도 없는 집 대신, 어떤 곳이라도 어른이 있는 곳으로 전전긍긍해야했다.


엄마 아빠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장아장 나서서 혹은 강보에 쌓여 잠이 든 채로 집을 나선 후 엄마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집밖을 맴돌아야했다.


그렇다고 해서 선진국처럼 검증된 보모를 구하기 쉽다거나, 사회주의처럼 시스템화 된 탁아시설이 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가 떠있는 긴 시간동안 아이들을 일관되게 돌봐줄 수 없는 곳은 없었기에 시간별로 끊어서 아이가 있을 공간을 찾아 이어주던 기억이 난다. 엄밀히 말하면 교육기관에서 보육을 했던 것이다. 직장맘 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각종 교육기관을 꿰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혹자는 말도 못 하는 아이를 너무 일찍 교육기관으로 내몰아 스트레스를 준다고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엄마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 그나마 유치원을 다닐 때가 엄마들 사이에서는 황금기라고 하는 이유 역시 유치원과 학교라는 검증된 정규교육과정이 마치는 시간에서 기인한다.


유치원의 경우, 방과 후 수업을 주5일 동안 선택하면 3시까지 아이가 한 곳에서 머물 수 있지만 입학하여 초등1학년이 되면 그 시간은 1시로 조절된다. 그동안 3시 이후부터 아이를 돌봐왔던 엄마는 직장 혹은 간난동생이 있어서 손을 넉넉히 내어줄 수 없다면 1시에서 3시까지의 시간을 새롭게 메꾸어야 한다.


대한민국 유치원생이 가장 많이 다니는 예능 학원은 태권도와 피아노가 된 것은 이 두 가지가 매일 다닐 수 있는 학원이기 때문이다.


그 외 학원이라 불리는 별도의 과외수업은 대부분 일주일에 한번에 그치기 때문에 요일별로 새로운 과목들과 만나게 되는데


매 수업 해당 선생님은 가베가 얼마나 많이 공간감각을 키우는지, 레고 수업이 창의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는 원리를 설명해주시지만 직장 맘의 진짜 속마음은 그저 안전한 곳에서 덥거나 춥지 않게 다치지만 않았으면 하는 아이돌봄이라는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음은 끝내 선생님이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 360도로 삶을 나누어도 1도, 2도 각 각의 도수마다 촘촘하게 역할의 짐을 지고 있는 현대인 혹은 우리네 부모님들은 몸에 착 붙어버린 습관이 되어 젊어서는 일에 치여 살고 60대 이후에도 손에서 일을 놓치 못하게 한다.
▲ 360도로 삶을 나누어도 1도, 2도 각 각의 도수마다 촘촘하게 역할의 짐을 지고 있는 현대인 혹은 우리네 부모님들은 몸에 착 붙어버린 습관이 되어 젊어서는 일에 치여 살고 60대 이후에도 손에서 일을 놓치 못하게 한다.

● 바쁨을 애써 맞이하고 있는 지도


유치원생 말고 어른들은 어떨까? 요즘 우리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일을 할 수 없거나, 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은 2순위가 되고 오직 일만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처럼 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에너지를 꺼내 써야하는 철인이 되어야하는 두 가지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 생산적일 수 있다는 전문가의 말이 고용주에게 전달되기에는 우리경제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중용과 중도라는 사상을 오랜 기간 받아들인 조상을 가진 우리가 워라벨이라는 트렌드를 가지겠는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 그 동안 삶의 방향을 만들어냈던 웰빙과 힐링 개념도 워라벨 속으로 흡수될 만큼 강력한 추세로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다.


바쁘다 바쁘다 중얼거리면서 살다보니 우리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잠식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5월에는 의도적인가 할 만큼 많은 기념일이 있다. 일부러 일을 쉬고 내 부모와 아이들, 은사님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빨간 글씨로 달력에 자리하고 있다. 5월초인 이 날짜들에 우리가 안부와 마음을 전하려면 지금부터 계획해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1년에 한번 있는 이 기회를 무의식중에 바쁘다는 변명으로 넘기려 하지는 않는가? 바쁘다는 가정을 먼저 세우고 당일 날 무슨 일이 있는지 혹은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있다면 걱정한대로 바쁨에 우리는 잠식당한 것이다.


실제로 바빠서가 아니라, 지금껏 바빴던 것처럼 앞으로도 당연히 바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쁨을 애써 맞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부모님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우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첫사랑의 설렘으로 은사님의 은혜를 오랫동안 기억했었지만 지금은 연락이 소원해졌다. 이번 5월에 있는 감사의 날에는 우리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말자.


가장 구차한 변명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현자는 말했다. 만약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 당신은 잘 못 살고 있다 라는 따끔한 일침이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달이다. 우리가 선택을 함에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일까?


▽ 타이틀 각주 5월에 다채롭게 분포된 빨간 날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치지 말자는 내용


■ 프로필


2012년 예술세계 등단


현 안양 샘병원 치과의사


10기 EBS 스토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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