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신성일’,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박지영 / 기사승인 : 2012-01-03 13:32:22
  • -
  • +
  • 인쇄



[일요주간=박지영 기자]‘청춘은 맨발이다’는 신성일이 지난 4월부터 11월까지 중앙일보 일간스포츠를 통해 연재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역은 에세이집이다. 청춘스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당대 최고의 여배우 엄앵란과의 결혼식, 영화계 생활과 정치 입문에 이은 수감생활, 그리고 故 김영애와의 밀애를 담았다. 또, 시비가 생기면 어떤 사람과도 한판 붙는 스타일인 그의 성격처럼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속 시원히 털어낸 한국 현대 문화, 정치계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수십 년을 발뒤꿈치 들고 뛰어다닌 신성일의 엄지발가락은 흉측하게 튀어나와 있다. “젊은 놈들 하나도 안 무섭다”고 큰소리치는 그는 요즘도 매일 달리기를 하고 아령으로 몸을 만들며 운동한다. 70대하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과대포장되거나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도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생은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정면으로 돌파하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메시지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자 하며, 故 김영애와의 가슴 속에 간직한 사랑 이야기를 그녀의 사진과 함께 처음으로 공개하며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특히 밀봉된 페이지에는 중앙일보 일간스포츠에서 연재되지 않는 김영애와의 사랑이야기와 엄앵란도 모르는 미공개 사진이 담겨있다.


신성일은 1970년 여름 볼링장에서 김씨를 처음 만났다. 김씨가 살던 미국, 또는 자신이 국제 영화제 참석으로 인해 해외로 나갔을 때 밀회를 했다.


아내몰래 유럽여행을 하고, 김씨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했다는 사실도 당당하게 밝혔다. 1973년 친구 사무실에서 통화를 할 때였다.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냥 멍하니 있는데 그녀가 ‘그럼 알아서 할게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소식이 두절됐고, 그 사이 김씨는 아이를 지웠다.


1년 뒤 신성일이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김씨가 미국LA에서 현지 한국일보에 실린 신성일이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베를린을 왔다. 1년 만의 재회에서 낙태한 사실을 알았고 아이를 잃고 삭발을 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김씨가 빌린 차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사랑을 속삭였다.


10여년이 흐른 1985년 봄 무렵, 그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신성일을 있게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신상옥 감독이다. 신성일은 1959년 신필름의 신인 공채 배우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 당시 별명이 ‘영화에 미친 야생마’였던 신 감독의 열정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정진우감독은 ‘영화는 카메라가 펜이나 마찬가지다. 카메라로 써내려가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철학으로 촬영했다. 국내 영상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신성일과 동갑인 정진우 감독은 <배신> 촬영 당시 신성일과 엄앵란의 키스를 최초로 지켜본 목격자다. 그는 1966년에만 <초연>, <하숙생>, <초우>, <악인시대>등 다섯 작품을 한꺼번에 찍으며, 무려 22일 동안 못자고 촬영했다고 한다. 최고의 인기감독이었던 그는 과격한 성격과 거침없는 말투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정진우 감독은 신성일이 ‘영화인’이란 타이틀을 붙이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다.


신성일은 마음이 맞는 파트너로 감독 이만희를 꼽았다. 눈빛만 봐도 통할 정도로 이 감독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하드보일드한 청춘영화를 만드는 데 그 둘보다 어울리는 단짝은 없었다. 신성일과 이만희 감독의 만남은 이 감독의 스타일을 바꾸는 전환접이 됐다 그 전까지 이 감독은 주로 장동휘, 박노식, 최무룡 등 선배 배우들과 작품을 많이 했다. 그는 작품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이후 나온 <만추>, <원점>, <휴일> 등은 둘의 호흡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신성일이 최고로 꼽는 영화 <만추>뒤에는 이만희 감독과 여주인공 문정숙의 애틋한 사랑이 있었다. 서로에게 반했지만 그들에겐 각각 배우자와 아이가 있었고 문정숙과 누구보다 친했던 엄앵란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이 감독은 1975년 봄 <삼포 가는 길>을 편집하던 중 충무로 중앙대 성심병원으로 실려갔다. 간암말기였다, 그는 입원 열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1969년 신성일과 윤정희는 <포옹>의 남녀 주인공으로 조문진 감독과 호흡을 맞추었다. 어느 날 조문진 감독의 어떤 촬영요구에 신성일이 모르는 체하고 현장을 떠났고 조 감독은 작품이 끝난 후 한 주간지에 “톱 스타는 다루기도 힘들고, 건방져서 감독하기 힘들다”는 인터뷰를 했다. 기분이 나빠진 신성일은 그 후 조감독과의 영화라를 피하려 했지만 <두 아들>을 같이 찍으며 가까워졌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조 감독은 1986년 <젊은 밤 후회 없다>에서 신성일의 아들 강석현을 데뷔시켜 기 해 대종상 신인상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1963년 늦가을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에서 영화<배신> 촬영장에서의 키스 사건과 자신이 더 다친 줄도 모르고 부상당한 엄앵란을 병원까지 호송했던 사건으로 신성일은 한 살 연상인 엄앵란의 마음속에 확실한 ‘남자’로 각인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신성일의 어머니는 재일동포 여배우 공미도리를 며느릿감으로 찍었다.


그가 모르게 양가 부모 사이에 혼담이 오가기도 했지만 1964년 11월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3,500여 명의 하객들이 워커힐 피시픽 홀을 덮쳐 통제 불능 상태가 되고, 앙드레 김이 만든 웨딩드레스는 짓밟히는 등 난장판 결혼식이 되었다. 또한 이태원 181번지는 신성일, 엄앵란의 보금자리일뿐더러 영화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되어 항상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분주 했다. 그리고 귀한 선물을 얻었는데 그들의 세 아이다. 큰딸, 아들, 작은 딸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15대 대선이 끝난 후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만나게 됐고,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박대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오게 된 것이다. 박 대표는 아무 연고가 없는 달성군으로 내려오는 고속도로에서 신성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신성일은 선거운동 기간 17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않고 박 대표와 함께 선거판을 누볐다. 박 대표가 정계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1971년 무렵 가택연금 시절의 JP와도 추억이 있다. 당시 연금된 JP와 부인 박영옥(박정희의 질녀)여사를 감히 찾아갈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 신성일은 빨간 무스탕을 몰로 청구동을 방문하곤 했다. 집에 들어가면 JP는 “바둑이나 두지”라며 아무 말 없이 바둑판에 앉았다. JP는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아는 정치가이자 예능인이며 로맨티스트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성인은 김종필 전 총리와 이후락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콩고물 발언’의 진상, 국회의원 낙선의 후폭풍과 세 번의 도전으로 금배지를 달기까지의 과정, 대가성 정치후원금을 받은 죄목으로 수감되어 지낸 구치소에서의 일들도 담담히 들려준다.


“청춘은 맨발이다”는 그의 자서전인 동시에 한국의 문화예술 연대기이며, 한국의 영화사가 된다.
지난 2007년 2월 출옥 이후 신성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은발의 베토벤 머리로 파마를 한 것이다. 수감 생활 중 윤정희, 백건우 부부가 선물해준 베토벤 관련 책을 읽고 자유로운 베토벤의 삶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신성일을 아내 엄앵란은 사랑하는 부부 이전에 삶의 동지라고 말하며 아내 엄앵란이 본 남편 신성일의 모습도 담았다.



책은 맨발의 청춘, 아낌없이 주련다, 내 추억 속의 스타들, 사나이 가는 길. 총 4Part로 나누어졌다.[문학세계사/신성일/1만 5천원]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