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이 참 좋은 녀석···은퇴 후 야구 행정가로 거듭날 것”

이 원 / 기사승인 : 2012-12-03 18: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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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코리안 특급 박찬호 은퇴
▲ 한화 이글스에서 야구인생을 마무리한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News1

[일요주간=이 원 기자] 11월의 마지막 날, 코리안 특급 박찬호(39)가 19년 야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누구보다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그의 은퇴 소식에 팬들은 아쉬움 마음과 함께 그에게 무한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해외 진출로 성공한 스포츠 스타가 전무했던 당시 박찬호는 야구팬들 뿐 아니라 단지 ‘그’이기에 보낸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특히 그의 전성기와 국내 IMF 사태가 맞물리면서 그의 등판은 팍팍한 서민경제에 ‘한줄기 빛’이기도 했다. 그의 은퇴는 단지 야구선수 한명의 은퇴가 아닌 국민들의 추억을 보내는 것이기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 리거
아시아출신 최다승 달성

30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은 박찬호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메이저리그에서 긴 시간동안 몸담았던 걸 생각해보면 운이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며 “한국 야구 역사상 저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며 운을 뗐다.

이후 그는 자신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진출에서 은퇴까지 야구인생을 돌아봤다. 그가 야구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단지 야구가 재미있었고, 친구나 선배보다 잘해보겠다는 경쟁심 때문에 노력해서 우승도 했다”는 것. 이렇듯 무심코 시작된 그의 야구 인생이 ‘코리안 특급’이 되기까지 얼마나 큰 땀과 노력이 있었을 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그런 그가 은퇴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터. “미국에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심각한 고민을 했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며 “내년이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돼서 죄송하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조심히 은퇴 후의 진로에 대해 말했다. 그는 야구 행정과 경영과 관련한 공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 “오랫동안 야구를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을 두고, 많이 배우고 경험하고 실험했다”며 “하지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야구 행정과 경영․운영 등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그러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다양한 공부를 위해 아마도 미국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유소년 야구에 대한 지원을 늘리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싶다”며 “현재 개최하고 있는 꿈나무대회도 의미를 더 높일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국내 팬들에게 앞으로도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눈시울을 붉히며 회견장을 나섰다.

불끈 쥔 그의 주먹, 희망을 품다

TV 마감뉴스가 끝나고 화면 조정 시간이 있을 당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불끈 쥔 주먹이 나오는 광고가 등장했었다. 한국의 IMF 경제 위기와 절묘하게 겹친 이 시기에 그는 메이저리그 특급타자가 되어있었다. 국민들은 그의 활약에 환호했고 학교와 직장에서 그의 경기에 대한 얘기는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93년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당시 LA다저스 스카우터 눈에 띈 그는 이후, 120만 달러에 연봉 10만9,000달러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번째로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그는 데뷔부터 1995년까지 약 2년 간 통산 4경기 출장에 그치는 등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에게 꿈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1996년 당시 팀 내 선발 에이스였던 라몬 마르티네즈가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가자 감독은 그에게 구원 등판의 기회를 주었다. 날짜도 생생한 4월 7일. 4이닝 동안 7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3피안타, 4볼넷 무실점의 기록으로 첫 승리 투수가 됐다. 이때부터 승리의 인생이 시작된 것.
▲ 은퇴식 당시 박찬호 앞에 걸린 유니폼들. 메이저리그와 일본리그, 그리고 국내 한화의 유니폼이 걸렸다. ⓒNews1

국내에서도 한동안 잠잠하던 그의 소식을 전했고 당시 경인방송(현 OBS)에서 그의 선발 등판 경기 독점권을 사들여 외신이 아닌 국내 방송에서 그의 모습을 접하기 시작했다.

미국 선수들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가 보여준 성적표는 너무도 화려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다. 당시 그는 75승 49패. 물이 오를 데로 올랐던 2000년에는 18승 고지를 점령했다.

메이저리그 정상급 타자들을 무릎 꿇린 150km/h 대 강속구를 비롯해 슬러브(Slurve)라는 커브(Curve 패스트볼의 회전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구질)와 슬라이더(Slider 패스트볼과 커브의 중간 형태의 궤적. 직구처럼 빠르게 날아오다 홈 플레이트 앞에서 던지는 팔의 반대쪽으로 급격히 브레이킹이 걸리는 구질)의 변형 구종을 구사하며 ‘코리안 특급’으로 급 부상 했다.

FA·허리부상 내리막길을 걷다

LA다저스 시절의 박찬호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그 이후 그의 행보에 안타까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승승장구하던 2000년-2001시즌 직후 그는 FA자격이 주어졌다. 언론은 그의 행보에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선택한 두 번째 메이저리그 팀은 텍사스 레인저스였다.

5년 계약에 6,500만 달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건으로 이적한 그는 다저스와의 팀 색깔이 다른 텍사스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팀의 에이스였던 그에게 쏟아진 관심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그간 고질병으로 앓아온 허리 통증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 첫 시즌 9승에 그친 그에게 쏟아진 악의적인 기사들은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텍사스에서 그는 등판하는 일도 줄어들었고 이후 2시즌 동안 그는 5승을 세우는 데 그쳤다. 그는 안정을 찾을 곳이 필요했다. 한국으로 복귀 후 그가 밝혔던 얘기지만 당시 그는 그만두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고 한다.

이후 샌디에고(2005) 뉴욕 메츠, 휴스턴을 거치는 동안 그는 한없이 추락했다. 7년만에 친정으로 복귀한 그는 이후 필라델피아와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를 거치면서 ‘통산 124승’을 끝으로 메이저리그 빅리거로 당당히 이름을 남겼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다시 한국리그로 돌아왔고 그의 야구 마지막 마운드를 조용히 끝마쳤다. 그는 현역에서는 물러나지만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와 함께 일희일비(一喜一悲)를 함께한 국민들이여, 이제 우리가 그에게 받았던 희망을 조금이나마 돌려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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