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창작의 자유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6-10-12 1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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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의 후기나 감상문을 쓸 만한 식견이나 능력이 없다. 영화를 깊이 있게 감상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 곁가지에 머물 때가 많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영화 한 편을 계기로 예술에서 창작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무엇인지 생각을 쓰려 한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의 소재로 삼을 때 허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역사를 그대로 옮기는 것만이 창작은 아니다. 기록에 없는 대화와 상황을 만들어 극적 긴장감을 높일 수도 있고,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상상으로 그려낼 수도 있다. 문제는 허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허구가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역사적 사실을 어디까지 바꾸어 놓느냐에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도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장면이 나온다. 한명회가 단종을 겁박하는 장면이다. 실록에 없는 장면인데도 이를 두고 별다른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왜일까. 그 허구가 영화의 중심 줄거리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바꾸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높이고 극적 재미를 더하는 단순 양념 역할에 머물렀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서 이런 정도의 허구까지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 「암살자(들)」은 경우가 다르다. 이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수사 당국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육 여사가 총탄에 맞아 숨진 사건으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문세광은 재판을 거쳐 그해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사건의 배후에 다른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추적한다.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통해 당시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권력기관의 개입 가능성 등 확인되지 않은 의문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았다. 제작진은 실제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야 할 것은 창작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허구가 작품의 어느 부분에 놓여 있느냐는 문제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허구가 역사적 이야기에 재미를 더하는 양념이었다면, 「암살자(들)」에서는 허구적 의혹이 사건 전체를 바라보는 틀에 연관되었다. 앞의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극적 장면을 보탰지만, 뒤의 영화는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었는지 묻는 일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다. 두 작품 모두 상상력을 사용하지만, 그 상상력이 역사적 사실과 맺는 관계는 같지 않다.

이 차이를 외면한 채 두 작품 모두 영화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창작의 자유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이 어떤 말을 했는지 상상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난 죽음의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이야기 전체의 중심에 놓는 일은 무게가 다르다. 허구가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의미와 책임의 방향까지 달라 보이게 한다면, 창작자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국정감사에서 영화 한 편을 놓고 여야가 부딪치며 고성이 오갔다. 여당은 영화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말아야 하며 창작의 자유를 침해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에 맞서 야당 쪽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신문과 방송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대중은 내 편 네 편으로 갈렸다. SNS에서는 온갖 말이 뒤섞여 와글거린다. 영화 한 편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 편 가르기로 번지면서 정작 따져야 할 본질은 뒤로 밀려났다.

물론 당시 사건에 의문을 영화로 제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공식 수사 결과도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된다면 기존의 해석을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의문은 의문으로, 확인된 사실은 사실로 구분해야 한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을 그럴듯한 장면과 이야기로 엮어 놓으면 관객은 그것을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창작자가 명시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더라도, 작품의 구성과 연출이 특정한 의혹에 무게를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책과 다르다. 두 시간 남짓한 영상은 인물의 표정과 음악, 사건의 전개를 통해 관객의 감정에 직접 호소한다. 글로 읽으면 의심할 만한 대목도 화면으로 보면 사실처럼 느껴질 수 있다. 특히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영화의 장면은 역사적 기억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영화 한 편이 역사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역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까지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육영수여사 피격 사건은 아직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유족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그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은 단순히 극적 재미를 더하는 것과 다르다. 실존 인물의 명예와 가족의 상처, 한 시대의 기억이 걸려 있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영화가 사회적 논란의 불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이 때문이다. 창작자는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흐려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키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나는 이 영화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었다고 해서 반드시 기존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술은 권력을 비판할 수 있고, 역사의 빈틈을 파고들 수 있으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사실에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것이 창작의 자유다. 그러나 자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라는 자막 한 줄이 모든 것을 면책되지는 않는다.

흔히 유명인이 공개된 장소에서 피격되거나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갖가지 소문과 음모론이 뒤따른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 너머에 감춰진 진실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한다. 영화가 그런 호기심을 소재로 삼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호기심을 흥행의 소재로 삼는다면 그만큼 신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의혹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감독과 배우도 돈을 벌어야 하고,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이다. 그것을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흥행을 위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혹을 부풀리고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린다면, 그것은 창작의 자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남긴다.

영화의 자기검열이라는 말도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에 따른 통제를 뜻해서는 안 된다. 창작자가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의 비난을 두려워해 스스로 표현을 제한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과 의견, 기록과 상상을 구별하고 자신의 표현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살피는 일이다. 사실 자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는 이미 주관이 개입한다. 그렇다고 사실과 주관의 구별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시선이 주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창작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러나 그 자유가 사실을 왜곡되게 다루거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창작의 자유는 책임 밖에서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책임을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자유도 온전해진다.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ch25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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