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계급도 남기지 못한 채 적진에서 산화한 전우들…국가추모시설 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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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연 글로벌첩보전연구소 대표. (사진=이진영 기자) |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적진으로 향했던 용사들이 있다. 임무는 척후와 정찰, 주요 시설 파괴와 요인 제거였다. 붙잡히면 국가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웠고, 전사해도 시신조차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북파공작원’이라고 불렀다.
그 뿌리는 6·25전쟁 당시 적 후방에서 활동한 KLO부대와 호림부대, 구월산유격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주요 작전에서 정규군이 수행하기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과 희생은 오랫동안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었다.
제헌절인 7월 17일, 장맛비가 잠시 그친 오후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1980년대 초 북파공작팀장을 지낸 이시연 글로벌첩보전연구소 대표를 만났다.
◇ 북파공작부대 HID팀장, 그리고 백발의 시인
‘북파공작부대 팀장’이라는 이력에서 거칠고 우락부락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기자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든 사람은 검은 테 안경을 쓴 백발의 노신사였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차분한 표정은 특수부대원보다 소설가나 시인을 연상시켰다.
“대표님은 특수부대 출신이라기보다 시인처럼 보입니다.”
인사처럼 건넨 말에 이 대표가 조용히 웃었다. 그는 실제로 전역 후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다. 한동안 국제펜클럽 관련 활동도 했다. 혹독한 훈련과 복무 과정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고통받았고, 시를 읽고 쓰며 마음속 상처를 견뎌냈다고 했다.
“말로는 꺼낼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시는 그 기억을 밖으로 꺼내면서도 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었습니다.”
현재 글로벌첩보전연구소 대표로 활동하며 첩보전과 특수임무의 역사를 알리는 것도 먼저 떠난 전우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 “팀장이 먼저 가야 대원들이 따릅니다”
북파공작부대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묻자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우리 대원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이름하여 북파공작원이지요.”
이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휴전 이후 이어진 대북 특수임무는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을 전후해 더욱 강화됐다. 당시 ‘물색관’으로 불리던 현역 군 간부나 병무 담당 요원들이 전국을 돌며 대원을 선발했다. 주로 신체가 건강한 고교생이나 20대 초반 청년들이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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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D 팀장 시절. (사진=이시연 대표 제공) |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자신이 희생하면 가족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지원한 청년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이었다.
“30㎏짜리 모래 배낭을 메고 양쪽 발목에 각각 5㎏의 모래주머니를 찼습니다. 야간행군을 하며 시간당 12㎞를 주파했고, 안전장치 없이 낭떠러지에서 밧줄을 타기도 했습니다. 산악지대에 홀로 숨어 뱀이나 들쥐를 잡아먹으며 버티는 생존훈련도 반복했습니다.”
팀장도 같은 훈련을 받았느냐고 묻자 그는 군더더기 없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팀장이 앞장서지 않으면 영이 서지 않습니다. 대원들에게 가라고 하기 전에 팀장이 먼저 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계급은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위험 속으로 먼저 들어가야 할 책임이었다.
◇ 침투는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위성사진과 첨단 감시장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사람이 직접 적진에 침투해 주요 시설을 확인하고 사진을 촬영해야 했다. 정찰과 첩보 수집부터 시설 파괴와 요인 제거까지 임무의 성격도 다양했다.
문제는 임무를 마친 뒤였다.
“폭파나 공격으로 소란이 일어나면 휴전선과 해안 경계가 즉시 강화됩니다. 그 경계를 다시 뚫고 돌아오는 것은 침투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침투계획은 있어도 복귀계획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작전도 있었습니다.”
전사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북측이 군사정전위원회 등을 통해 시신 송환을 제안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면 북파 사실을 인정하는 결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부 대원은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사형수·무기수 북파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무엇을 믿고 사형수나 무기수를 적진에 보내겠습니까. 투항 가능성과 국가관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원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기로 결심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 법은 만들어졌지만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2004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국가 차원의 보상이 시작됐고, 이후 관련 법률을 통해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도 마련됐다. 하지만 이 대표는 “법이 만들어졌다고 모든 희생이 확인되고 온전히 보상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수임무유공자들은 2008년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를 결성해 추모사업과 유해 발굴 지원, 재난구조와 구호활동 등 사회공헌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활동 모토는 ‘나는 오늘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다.
“국가가 오랫동안 우리를 잊었어도 우리는 조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임무가 끝났다고 나라에 대한 책임까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마음만은 영원한 현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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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수임무유공자회. (사진=이시연 대표 제공) |
◇ “7726이라는 숫자를 들어보셨습니까”
인터뷰 말미, 국가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 대표는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했다.
“기자님은 7726이라는 숫자를 들어보셨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한 글자씩 눌러 말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수임무를 수행하러 북으로 향했다가 전사하거나 실종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대표가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간절하게 호소한 것은 미귀환 특수임무수행자들을 위한 국가추모시설 건립이었다. 전국에 흩어진 추모시설을 통합하고, 이름 없이 산화한 이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기릴 호국추모공원과 위령비를 하루빨리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창밖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가리키며 이 대표가 말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킨 위대한 장군을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기립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음지에서 싸운 사람들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에게 이제는 국가가 자리를 마련해줘야 합니다.”
커피잔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돌아오지 못한 7726명의 영웅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 살아 돌아온 우리가 수행해야 할 마지막 임무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7726’이라는 숫자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의 뒤편에는 이름도, 계급도, 묘비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국가가 그들의 희생을 역사에 기록하고 국민이 찾아가 추모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조국은 이제 그들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일요주간 / 이진영 기자 kor67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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