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위안화 직거래 시장 개설은 세계 주요통화로서 위상을 확장 심화시킬 것이다. 이에 본보가 홍콩에서 중화권 무역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Kstars 그룹 리키장’과 함께 중화권 ‘경제·금융·무역’ 흐름을 심층 리뷰하며 전망 예시하는 기획 스페셜에 독자 제현의 호응과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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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56년간의 식민 통치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으로 정식 반환됐다. |
● 1997년 홍콩주권 역사적 이양
아편전쟁(阿片戰爭, 1839~1842)이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에 따라 홍콩 섬이 영국에 할당되었다. 1839년에 청나라의 승인으로 이루어진 아편 수입 금지안은 중국과 영국 사이의 제1차 아편 전쟁을 낳았다. 홍콩 섬은 1841년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난징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홍콩 섬이 정식으로 양도되었다. 1842년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의 건립과 함께 홍콩총독부를 신설하였다.
1860년 중국의 제2차 아편 전쟁 패배 이후에 바운더리 스트리트(Boundary Street)의 남쪽 까우룽(九龍) 반도와 스톤커터스 아일랜드(Stonecutters Island)가 베이징 조약 하에 영국에 귀속되었다. 1898년에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행정구역으로 알려진 산까이(新界)를 99년간 조차했다.
1900년대 중반 중국 공산당의 본토 장악 등 대변혁기에 홍콩의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장점으로 부각되어 무역, 금융 중심의 현대화된 도시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홍콩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약 3년 8개월 동안 일본의 점령시기에 이어 1946년 다시 영국의 직할 식민지시대로 재수립 되었다. 1982년 당시 영국 대처 수상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중국과 홍콩의 미래를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고 1984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베이징 회담에서 덩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비롯하여 ‘홍콩은 홍콩인이 다스린다’는 뜻의 ‘항인치항(港人治港)’과 ‘높은 수준의 자치’를 뜻하는 ‘고도자치(高度自治)’ 등 3개 원칙의 혁신적 구상 제안으로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는데 성공했다.
결국,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영국은 1997년 7월 1일 자정을 기점으로 홍콩의 주권을 영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전에 동의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은 홍콩이 1997년부터 50년간 1국 2체제를 유지하며, 법과 자치권을 유지하는 특별 행정구역으로 지정될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양도 후 헌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홍콩 기본법은 1990년에 제정되었다. 홍콩 기본법에 따르면, 홍콩특별행정구는 중국 영토의 일부로 고도의 자치권을 향유하며, 1997년부터 50년 간 지속하도록 되어 있다. 토지와 자원은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그 운영권을 보유하며, 기본법 해석 등에 관련된 주요 결정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보고되어 승인을 받는다.
국방과 외교는 원칙적으로 중국이 전담하지만 중국 정부는 홍콩 정부에게 '중국 홍콩(Hong Kong China)'이라는 명칭을 갖고 자율적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드디어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56년간의 식민 통치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으로 정식 반환되었다. 홍콩 반환 이후 실제 홍콩 정부의 자치범위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중국 정부는 1997년 7월 1일 이후에도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이행하게 될 국제협약 214개를 추인하고 그 리스트를 UN에 정식 통보했다.
127개 조약은 중국과 홍콩이 동시 가입한 조약이며 87개 조약은 홍콩만 가입하고 있는 조약이다. 홍콩이 가입한 국제기구는 세계무역기구(WTO), IMF(국제통화기금), WORLD BANK(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UNCTAD(유엔무역개발협의회), ESCAP(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옵저버) 등이다. 그리고 모든 스포츠 대회에 중국과는 별도로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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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는‘일국양제(一國兩制)’를 비롯하여 ‘홍콩은 홍콩인이 다스린다’는 뜻의 ‘항인치항(港人治港)’과 ‘높은 수준의 자치’를 뜻하는 ‘고도자치(高度自治)’ 등 3개 원칙의 혁신적 구상 제안으로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는데 성공했다. |
● 행정의회와 입법회가 구심점
홍콩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최고법은 홍콩 기본법이다. 정부 조직은 권력분립 원칙에 의거하여 행정부인 행정의회와 입법부인 입법회, 그리고 사법부인 홍콩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특별행정구(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로서 중국과는 독립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에 해방되는 홍콩 자치구의 수반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홍콩행정장관(香港行政長官)이다. 임기는 5년이며 1차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전임 행정 장관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면 다음 임명자는 남은 임기를 차기 임기의 5년에 더한다.
홍콩행정장관은 산업금융계 300명, 전문직계 300명, 노동·서비스·종교계 300명, 정계 300명 등 1200명의 선거위원회에서 간접 선출된 후 중국중앙인민정부에 의해 임명되는데, 대부분 친중국 성향의 정치가가 선출된다. 자격은 40세 이상의 중국인으로 20년 이상 홍콩에 거주해야 하며, 외국에 거주권이 없는 홍콩 영주권자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입법부에 해당하는 기관은 ‘홍콩 입법회’이다. 현재 60명의 의석이 있고, 임기는 4년이다. 입법회 60개의 의석 중에 30석은 5개의 지방별로 비례 대표제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그 나머지 30명은 28개의 기능별 단체에 속한 사람만이 투표권을 갖는다. 지방 직접 선거에는 모든 사람에게 한 표가 주어지지만 기능별로 조직되는 의석은 15만 명의 선거 유권자만이 투표 할 수 있다. 임기는 4년이며 친(親)중국계가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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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홍콩을 잇는 가교는 주홍콩연락판공실이다. |
● 초대 홍콩행정장관(香港行政長官) ‘동낀화’
동낀화(董建華)는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첫 번째 홍콩 특별 행정구 행정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2002년 재선되었으나 5년 임기 도중인 2005년 3월 12일 건강상 이유를 들어 사임했다. 동낀화는 저장성(浙江省) 저우산(周山)군도 출신의 선박왕 동하오윈(董浩雲) 회장의 장남이다. 1937년 7월 7일 상하이에서 태어나 1949년 중국 공산화와 함께 12살 때 부친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했다. 동낀화는 동향인 상하이 출신의 장쩌민(江澤民) 前 총서기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덕분에 동낀화는 장쩌민 집권 때인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전 홍콩특구준비위원회의 150명 위원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장쩌민은 동낀화를 ‘행정장관’으로 낙점했다.
동낀화는 행정장관을 떠난 후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을 맡았으며 중미교류기금회가 2008년 만들어진 후 줄곧 회장을 맡고 있다. 근래 동낀화는 미·중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2015년 9월 14일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동낀화는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개인적 인연, 미국 내 인맥을 통해 미·중 외교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 제2대 홍콩행정장관(香港行政長官) ‘짱얌퀸’
前 중국 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 정권은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공행정을 공부하는 등 국제 감각이 뛰어난 짱얌퀸(曾蔭權)을 동낀화의 후임으로 낙점했다. 짱얌퀸은 일제 점령기인 1944년 10월 7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짱얌퀸의 원적은 광둥성(廣東省)이다. 부친은 영국 식민지 정부의 경찰이었다. 1967년에는 홍콩 총독부를 홍콩정청으로 개칭했는데, 이때부터 짱얌퀸은 38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한 정통 관료 출신이다.
승진을 계속해 1995년에는 마지막 영국 식민지 총독인 ‘크리스 패튼’(Chris Patten) 아래서 중국인 최초로 재무국장에 취임하였고 2001년 2월에는 특별행정구 ‘넘버2’인 18만명의 홍콩 공무원을 지휘하는 정무국장을 맡았다.
2005년에는 동낀화가 행정장관을 사임하면서 행정장관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짱얌퀸은 장관 선거에 참가한 선거 위원 796명 중 674명의 추천을 받아 홍콩 행정장관으로 당선되었다. 2007년 3월 25일에 실시한 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쩡인취안은 베이징과 홍콩 사이에서 밀월관계를 구가했으나, 말년에 마카오 도박장 출입, 호화주택, 자가용비행기, 요트 접대로 구설에 올랐다. 짱얌퀸은 2012년 불명예스럽게 5년 임기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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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판공실(中央人民政府駐香港聯絡辦公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 마카오의 정책 등을 관할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소속 행정기관이다 |
● 제4대 홍콩행정장관(香港行政長官) ‘령짠잉’
2012년 3월 25일 치러진 제3대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짱얌퀸의 후임으로 령짠잉(梁振英)이 선거인단 1,200명의 과반을 넘는 689표를 얻어 당선됐다. 령짠잉은 2012년 7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원적은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 1954년 8월 12일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 식민지 경찰로 일했던 아버지 아래서 성장했다. 후진타오(胡錦濤)전 중국 주석의 임기 말이었던 2012년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해 세 번째이자 제4대 홍콩 행정장관으로 당선된 것이다.
전형적 자수성가형 정치인 령짠잉은 한때 측량기사로 일했고, 영국 유학시절, 식당에서 시간제로 일하며 학업을 마쳤다. 귀국 후 부동산컨설팅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뒤, 1985년 정계에 입문했고, 1999년부터는 홍콩행정회의 의장을 지내다, 2012년 홍콩 행정장관에 선출됐다.
령짠잉은 저장(浙江), 푸젠(福建), 광둥(廣東) 등 중국 남부인이 주류를 이루는 홍콩 사회에서 이질적 존재다. 령짠잉 전임인 짱얌퀸의 본적은 광둥성, 전전임자인 동낀화는 본적이 저장성으로 모두 중국 남부인들이다.
2016년 4월 13일 령짠잉 행정장관은 홍콩 완차이(灣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터넷 경제 서밋 2016’ 개회사에서 “홍콩은 중국의 일부인 동시에 별개의 사회적·경제적 체제를 가진 국제도시라는 점을 활용해 기술과 혁신이 넘쳐나는 도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재산업화를 선언했다. 령춘잉 행정장관이 말한 재산업화는 IT와 각종 산업이 결합하고 융복합화하면서 새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의 탄생을 일컫는다.
● 홍콩의 미래는 항속적 장밋빛일까
올해는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홍콩에 첫 발을 내딘지 20년이 경과되었다. 홍콩에 진주해 있는 인민해방군은 약 5000명이다. 1997년 7월 1일 인민해방군은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이관되던 날 홍콩 정부청사 옆에 있는 한 건물에 자리 잡았다. 이전의 영국군 해군본부 건물을 이용하고 있다.
홍콩 주재 인민해방군(PLA)의 임무는 홍콩 시민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은 자신들이 지켜야하는 시민들과 극도로 제한된 접촉을 하고 있다. 이들은 홍콩의 중국 반환식 때 이외엔 단 한 번도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 일이 없다. 보이지 않게 군림하는 셈이다.
인민해방군 이외에 치안을 담당하는 홍콩의 경찰은 약 3만1000명가량으로 모두 홍콩인들로 구성돼 있다. 홍콩 인구 약 200명 당 한 명 꼴인데, 교육수준이 높고 평균 연봉이 80만 홍콩달러(약 1억원)를 넘어 일반인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홍콩이 폭넓은 자치를 누리고 있다고는 하나 무제한적 자치는 아닐 것이다. 중국과 홍콩을 잇는 가교는 주홍콩연락사무실이다.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사무실(中央人民政府駐香港聯絡辦公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 마카오의 정책 등을 관할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소속 행정기관이다. 주로 홍콩과 마카오 간 중국 본토의 경제, 과학, 교육 등의 협력 및 교류 촉진 역할과 중앙정부 사이의 연락과 감독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홍콩 반환 직후 홍콩마카오 연락사무실 주임은 공산당 원로인 랴오청즈(廖承志)의 아들인 랴오후이(廖暉)였다. 랴오후이 주임은 홍콩 반환 직후부터 무려 13년간 홍콩 사무를 총괄했고, 2010년부터는 왕광야(王光亞)가 관할 중이다. 상하이 출신의 왕광야 주임은 홍콩과 접경한 광동성 선전(深圳)에 상주하며, 중국 외교부 유엔대표부 대표와 외교부 부부장 경력의 외교관이다.
과연 홍콩의 미래는 여전히 안정적이며 낙관적일까? 홍콩인들은 특별행정구 내에서는 홍콩기본법이 50년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병존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보장하기에 행정장관 역시 특별구 주민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홍콩특별행정구 주민들과 중국 중앙정부는 동상이몽이다.
중국 중앙정부는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투표를 놓고 후보 추천위원회를 통해 반중 성향의 후보를 사전에 걸러내겠다는 방침이나 홍콩 시민들은 직선제의 본질을 최대한 살려 누구나 제한 없이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홍콩은 중국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형국이다. 2017년 행정장관 후보를 친중국 인사로 제한한 중국 중앙 정부의 직선제 선거안이 2015년 6월 18일 홍콩 의회에서 압도적 표차로 부결된 것. 의원 70명 중 표결에 참여한 의원은 37명으로 반대 28표가 나왔다. 이에 따라 선거안은 재적 의원 3분의 2인 47명의 찬성을 얻는 데 실패하여 통과되지 못했다. 2017년 홍콩 행정장관으로 친중국 인사를 세우려 한 중국의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됐고, 중앙 정부의 일방적 선거안 추진에 일단 제동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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