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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
이러한 논리가 가장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가지는 것이 법원 판결문이다. 재판관은 자신의 입맛이나 성향에 맞는 법 적용을 하며 이때 내세우는 논리가 명쾌함보다 권위적이다. 민감하거나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사항에는 애매모호한 말로 판결문을 새끼줄 꼬듯이 배배 꼬는 기술이 가히 언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리며 일반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를 쓰고 있다. 판결문의 권위를 내세워 불합리하고 비논리적 언어를 합리적 옷을 입히는 경우 대개 다 그렇다. 물론 요즘 성행하고 있는 법원의 판결문 모두 불합리하고 허술한 것만은 아니지만 사회적 관심을 끄는 민감한 문제에는 그런 것이 종종 눈에 띌 정도로 흔한 것이 사실이다.
법원의 상징으로 저울을 들고 있는 추(椎)가 가운데 있다. 저울 무게 중심이 기울지 않는 것으로 모든 사건을 공평하게 다룬다는 뜻이리. 그럼에도 이현령비현령이 가장 잘 통하는 곳이 법원이다. 그만큼 모든 사항에 유불리 법 적용에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적용하는 개인 인격과 성향에 따라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유전 무죄' '권력 무죄'가 공공연히 성행하는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발생된다. 최근 사회 통념을 뒤집은 법원의 판결을 보며 국민은 의아하다 못해 아연하다. 단돈 800원을 횡령한 버스 운전사의 잘못 심판은 준엄했지만, 그 보다 수 만 배 천문학적 금액으로 사회적 주목을 받은 자들의 정치적 판결은 헐렁하다 못해 흐물흐물하다. 이래서는 누가 법원 판결에 진심으로 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정의(Justice)란 단어는 천연기념물로 전락됐다. 그도 그럴 것이 올바른 법집행보다 내 편 위주, 가진 자 위주로 법 집행이 이루어지는 한심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수긍하는 사회 통념은 숫제 낯선 단어로 들리며, 전국시대의 사상가 공손룡이 주장한 '백마 비마론'을 연상하는 말이 되었다.
최근 법원의 김학의 출국금지 불법 집권남용 사건만 보면 검찰의 위법을 인정하면서도 '목적의 정당성'이라는 말장난으로 불법 수사 검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목적이 과정을 무시하는 처사, 목적만 정당하면 과정에서 '공권력의 권한남용' 불법은 괜찮다는 논리가 충격적이다. 이러고도 선진국이라 자처할 수 있겠는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옛말에도 백성은 가난보다 불공정에 분노한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다 한들 운영하는 사람이 일방적이면 시스템이 엉망이 된다. 결국 좋은 법 올바른 판결은 법보다 사람의 문제다. 판사는 개개인이 하나의 법원이다. 판사가 회색빛 논리로 사회 통념에 반한 판결이 계속된다면 누가 우리 사회를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고, 판결을 존중하며 신뢰할 수 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재판이 정치와 연계되며 판사가 엿장수로 변질되었고 판결문은 엿장수 가위질에 따른 엿판이 되었다. 엿장수들은 엄중한 판결문에 회색빛 법 이론을 동원하여 사회 구성원의 건전한 상식에 치명타를 가하는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상식이 이론에 끼워 맞추기 위해 현실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올바른 상식에 부합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론이 존재하는 것이다.
법조 카르텔이 만개(滿開)한 어용 법조인의 전성시대, 대한민국은 이미 죽은 법조인의 사회로 변모했다. 그들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법권으로 국민을 이기려 하고 있다. 정치에 기생해 법관의 소신과 공평은 뒷방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 저잣거리에는 법조인을 법률 기술자. 법꾸라지 라는 비아냥이 나돌고 최후의 보루, 대법원마저 판결 내용에 의심받는 지경이다. 요즘 사건의 결과를 보면 법을 밥으로 읽지 않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다. 국민의 최후의 보루가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수많은 법관이 제각기 다른 정의관과 회색 논리를 가지고 재판을 하기에 결과와 신뢰에 강한 의구심이 든다. 한비자는 법은 신분이 높은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法不阿貴)고 했다.
지금 법조인을 불신하는 소리가 임계점을 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힘없는 우민(愚民)들이 아무리 목청을 모아 그들의 잘못을 외쳐본들 메아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이런 상황에 무슨 수로 우리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정의를 찾아내고 자주와 양심의 기준을 설정해 내겠는가. 법조인 스스로 더 늦기 전에 사회 통념이 지향하는 가치의 개념부터 바로 직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시급한 문제 그것부터 모두에게 수긍되는 의미로 규정하여 그 실질을 채우려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신뢰를 회복하며 불신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민감한 사항에 국민 다수가 수긍할 수 없는 법 적용은 기껏해야 불신만 조장할 뿐이다.
법을 다루는 인격체들이 입는 논리의 옷, 이론과 의미의 상징인 옷의 무게는 범죄자에겐 저승사자, 억울한 피해자에겐 성직자의 옷으로 우리 사회를 올바르고 정의롭게 인도한다. 그래서 검은 법복을 입었을 때 신성 불가침한 인격으로 존중되기에 재판 시작할 때는 나이와 직위에 상관없이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호칭된다. 그럼에도 옷 입은 인격체가 옷값을 제대로 못 하여 신성한 법복이 일개 유니폼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과, 회색 법 적용으로 국민 다수의 상식에 재를 뿌리는 암담한 현실이 서글프다. 논리가 백번 옳아도 보편적 통념의 상식과 정서에 반하는 이론이 실상에 횡행하는 사회, 이런 일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논리는 국민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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