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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지금, 5월의 산들은 날마다 부풀어져 새로운 관능으로 빛난다. 산, 초록 숲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우며 사람을 유혹한다. 봄볕 쪼이는 산의 푸르름은 책을 보며 지내는 나를 기어이 방 안에서 추방시켰다. 휴일 모처럼 나들이 온 산에 적막은 간 곳이 없고 사람들의 소음으로 뒤덮여 있다.
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산을 말할 때 도심 주변의 산은 적막하지 않고 일상과 잇닿아 있다. 휴일의 산은 사람으로 뒤덮이는 인산(人山)이다. 삶이 고단하며 세상이 어지럽고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절박하다. 그 유혹은 하산길에서 깨어져 버리는 몽상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의 유혹이 없다면 누가 비지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겠는가. 땀을 한바탕 흘리며 그늘 좋은 곳을 찾아서 마른 김밥을 씹으면서 산꼭대기 위를 지나가는 흰 구름에게 내면의 말을 주절거린다.
퇴계는 평생을 산이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는 제자들과 안동 청량산을 즐겨 찾았고 멀리 갈 때는 풍기 소백산까지 다녔다고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도피와 일탈로서 산행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가르쳤고, 산속에서 '청학동'을 묻는 자들의 몽상을 꾸짖었다. 산에 가서 '안개와 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먹으려는 자들'을 퇴계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산 스스로 아무런 말이 없는데 산에 속아 넘어가서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겼다. 산을 보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는 것이 산에 처하는 퇴계의 마음이다.
산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주변과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산은 아름답다.
산에 관한 퇴계의 글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퇴계의 산은 외지 곳에 홀로이 돌아앉은 산이 아니라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구현되어야 할 조화의 산이다. 퇴계의 산행은, 돌아서서 산과 함께, 산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오기 위한 산행이고 인간의 마을을 새롭게 하기 위한 의로운 산행이었다.
남명 조식은 일찍이 벼슬을 마다하고 천왕봉이 보이는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짓고 은거하며 세상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는 덕산에 터를 잡고 "봄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울 풀 없으랴마는/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이 좋아서 왔네/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까 하지만/은하 십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는구나." 라며 산을 노래했다. 산을 사랑하며 은하수를 마시며 살겠다는 초탈한 기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명은 지리산 자락에 살며 왕이 몇 차례나 불러도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자세는 세상이 그의 높은 뜻을 담을 수 없는 대붕의 모습이라, 진정 높은 것들은 높은 것들 속에서, 진정 깊은 것들은 깊은 곳들 속에서 나오게 마련인가보다.
나는 평소, 생활에 발목이 잡혀 도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가엾다. 산을 찾고 싶어도 삶이 생활을 완벽하게 장악해서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찾는 산은 글 속에서나 찾는 상상 속 산이다. 그 산은 항상 온갖 이론으로 뒤덮여 오염이 되어있다. 이 산으로 가니 이 말이 맞고 저 산으로 가니 저 말이 옳아 무엇이 올바르고 어떤게 맞는 것인지 구분이 어렵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닌 건 아닌데 사람들은 배를 짊어지고 '배가 산으로 간다'며 싸운다.
꽃 피고 새 우는 산을 말하려다, 산이 은유의 산으로 바뀌면서 세상 이야기로 둔갑했다. 내가 하는 게 매번 이 모양이다. 그만 쓰자, 그만 쓰고 내친김에 햇볕 가득한 가까운 산골짜기 숲속을 찾았다. 숲에서 생각할 것은 도덕 윤리가 아니다. 윤회의 업을 내려놓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인다. 초록 세상에 묻혀 땀을 식힐 때, 문득 조선 순조 임금 시대의 문인 남공철이 쓴 "푸른 산은 약 대신 쓸 수 있고 강물은 오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자연은 그 자체로 치유력을 품고 있어서 소박한 마음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사람은 몸이 튼튼하게 할 수가 있다는 뜻이리. 분에 넘치는 생활은 욕심이며 욕심이 과하면 그것에 휘둘리며 탈이 난다는 걸 산은 가르친다. 산을 내려오며 혼자 주절거린다. 오랜만에 찾은 산은 말이 없는데, 나 혼자 산에 대고 온갖 상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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