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세 여인을 흠모하고 가슴을 태워

정성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17-06-26 12:51:16
  • -
  • +
  • 인쇄
<문화의 원류>조선 ‘3대 명기’의 사랑
▲ 정성수 시인
황진이, 진사 서녀출생 우여곡절 끝에 기생
옷 벗기고 직접 물기를 닦아주었으나 ‘웬걸’

‘매창’ 아전의 딸로 조선 중기의 부안 기생
한시에 능통, 허균 권유로 ‘도선 사상’ 심취

‘김부용’ 평안도 성천서 가난한 선비 외동딸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


[일요주간 = 정성수 칼럼니스트] 기생은 잔치 또는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등으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자를 이른다.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으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한다.

기생 학교를 교방(敎坊)이라 하며 기생이 되는 일은 사대부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과 다를 것 없는 난이도였다. 춤과 노래는 기본이고 급에 따라 판소리나 잡가, 민요는 물론 기악, 화술, 용모, 각종 재주 등 선비들처럼 공부해야 했다. 지역에 따라 말을 타는 재주도 배웠다. 이렇게 해도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대우가 천양지차로 다르고 허락되는 예술 종류마저 제한되었다.

기생의 활동기간은 15세부터 50세로 어린 기녀를 동기(童妓), 나이 든 기녀를 노기(老妓), 나이가 많아 퇴역한 기녀를 퇴기(退妓)라고 불렀다. 송도 황진이, 부안 매창, 그리고 운초(雲楚) 김부용은 조선의 3대 명기(名妓)이자 여류시인이다.

▲ 서경덕은 황진이를 반갑게 맞았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황진이의 옷을 벗기고 직접 물기를 닦아주었다.

■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황진이’


기생 황진이(1511~1551)는 ‘진랑’이라고도 하며 기명(妓名)은 명월이다. 송도(개성)의 양반 황 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기생이 되었다. 황진이는 ‘사서삼경’을 읽고 시 · 서(書) · 음률(音律)에 뛰어나 뭇남자들의 시선을 받았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다. 총각의 주검을 실은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는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황진이는 기계(妓界)에 투신하여 문인 ·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출중한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황진이가 당대의 소리꾼인 선전관(宣傳官) 이사종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황진이는 이사종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딱 6년만 같이 살자, 3년은 선비님이 마련한 집에서 선비님이 생활비를 대고, 그 뒤 3년은 우리 집에서 제가 생활비를 대어 살자’ 고 말했다. 이사종이 ‘그러마’고 약속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계약결혼’이었다. 이사종과 6년의 결혼생활을 마친 황진이는 짐을 꾸렸다. 당황한 이사종이 울고 불며 매달려도 황진이는 매몰차게 계약결혼을 마쳤다.

소세양(1486년~1562년)과의 30일간의 사랑은 애틋하다. 그는 조선 중기 전라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7살에 시를 지었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황진이가 절세미인이란 소문을 들은 소세양은 친구들에게 장담을 했다.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너희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황진이를 만난 소세양은 30일의 약속으로 동거에 들어갔다.

마침내 30일이 되자 소세양은 황진이와 함께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시 한 수를 소세양에게 써 주었다.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이다. 황진이의 시는 소세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종실(宗室)인 벽계수(碧溪守) 이종숙은 세종대왕의 17번째 아들 영해군의 손자로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벽계수의 호언장담을 전해들은 황진이가 ‘벽계수를 개성까지만 데리고 오면 그 다음은 불문가지’라고 했다.

개성 인근까지 말을 타고 도착한 벽계수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한번가면 다시 못 온다’는 시조를 읊는 황진이의 자태에 넋을 빼앗기고 그만 낙마했다. 그런 연유로 이 시는 벽계수 ‘낙마곡(落馬曲)’으로 유명하다.

지족선사(知足禪師)는 천마산 지족암(知足庵)에서 30년 수행으로 ‘생불(生佛)’이었다. 황진이는 생불이라 불린 지족선사를 시험해보기 위해, 비오는 날 소복을 입고, 흠뻑 젖힌 채 그를 찾아갔다. 비에 젖은 황진이는 지족선사 앞에 무릎을 꿇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지족선사는 그만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이 생겨났다.

화담(花潭) 서경덕이 송도 부근의 성거산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비가 오는 날, 비를 흠뻑 맞은(황진이의 계략) 황진이는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찾아갔다. 서경덕은 황진이를 반갑게 맞았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황진이의 옷을 벗기고 직접 물기를 닦아주었다.

서경덕의 행동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워했다. 날이 어두워져 이윽고 밤이 깊었다. 삼경쯤 되자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 그러나 황진이의 기대와는 달리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여러 유혹을 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자, 기생 일을 접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40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다.

▲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 허균 등 문사들과 깊은 교유 ‘매창’


매창(1573~1610)은 아전 ‘이탕종’의 딸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며 부안 기생이다. 가사와 한시 및 시조와 가무 그리고 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했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다. 매창은 조선의 평민시인 유희경, 인조반정 때의 공신인 이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등 당대 문사들과 교유가 깊었다. 조선시대에 한시를 잘 쓴 시인으로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이다.

매창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은 매창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전라북도 부안의 사또가 한양에서 온 친구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부안 기생 매창과 서자 출신으로 ‘위항시인(委巷詩人)’인 촌은(村隱) 유희경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마흔 중반이 되도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희경이었다. 양반들의 사랑을 받으며 명성이 높았던 매창이 신분이 높지 않은 유희경에게 끌렸던 것은 천민 출신이라는 공감대와 서로 간에 시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배꽃이 비처럼 내리는 날 유희경은 부안을 떠나 서울로 갔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도 소식이 없자 매창은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시를 지어 보냈다. ‘이화우(梨花雨)…’로 시작하는 시였다. 이듬해 초여름에야 매창의 시를 받아 본 유희경은 그리움을 담아 부안에 있는 매창에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로 시작하는 답시를 보냈다.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했듯이 매창 또한 유희경을 그리워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나 다시 만났지만 짧은 재회의 시간이었다. 함께 시를 논했던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이것은 이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매창이 3년 뒤인 16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희경은 매창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름난 기생 매창과 천민 출신의 유희경은 신분과 28세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10년 세월을 유희경만을 그리워하며 살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부안의 이웃 김제 군수로 내려온 이귀였다. 이귀는 1557년(명종 12)에 태어났다. 이율곡의 제자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는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군사와 군량미 등을 모아 전쟁을 도왔으며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전세를 만회케 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런 인물에게 매창이 마음이 끌려 그의 정인(情人)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귀와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신해(宦海)를 떠도는 이귀의 입장에서 매창에게 안도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남자마저 떠나보낸 매창은 사랑의 덧없음과 인생사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매창이 교산(蛟山) 허균(1569~1618)을 만난 것은 1601년 7월이었다. ‘이귀’가 1601년 3월에 전라도 암행어사 이정형의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하고 4개월이 지난 즈음 부안을 지나던 허균이 비를 피해 객사에 머물렀는데 매창이 거문고를 들고 찾아와 하루 종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이때가 허균이 33세, 매창은 기생으로서는 이미 늙은 나이인 29세였다. 허균은 매창이 이귀의 정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했다. 밤이 되자 매창이 자기 조카딸을 허균의 침소에 들여보냈다.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쫒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다,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자신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매창과 허균의 만남은 주로 시를 중심으로 한 문장 교류였다. 허균과는 10년간의 인연이 존재하였지만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는 매창은 성품이 고결하여 음란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창의 말년 시 세계가 ‘도선사상(道仙思想)’에 가까워진 것도 허균의 권유에 힘입은 바 크다. 허균은 매창의 시와 가무와 거문고에 반해 오랫동안 정신적 교분을 나눴다. 부안 ‘개암사’에서 출판한 ‘매창집’에는 주옥같은 매창의 한시 약 500여 수 중 현존하는 시 57수와 시조 ‘이화우’ 1수로 58수가 수록되어 있다.

▲ 김부용은 그녀를 이해해 주는 연천(淵泉) 김이양(1755∼1845)을 만나고 부터 여장부다운 시정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 나이와 신분을 초월 ‘운초 김부용’


김부용(1812~1861, 49세)은 자는 운초(雲楚), 호는 부용(芙蓉)으로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김부용은 기생이었으나 예술과 시문에 빛을 발휘해 성도의 ‘설교서(薛校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김부용은 이 같은 허명을 내던지고 금수강산을 유람한 후 문을 굳게 닫고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녀를 이해해 주는 연천(淵泉) 김이양(1755∼1845)을 만나고 부터 여장부다운 시정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부용집(芙蓉集)’에 300여 편이 있다. 김부용이 회자되는 이유는 당대에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김부용이 성천기생으로 이름을 날리던 20대 후반이었다. 대동강 연광정에서 평안감사 연회가 있었다.

평안도 관할구역 내 재임 중이던 김이양의 제자 성천부사 유관준이 기생 김부용을 데리고 가 인사를 시키면서 ‘저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오니 대감께서 맡아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김이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77세에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니 사양하겠다’며 그의 청을 거절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19세 김부용은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에는 30객 노인이 있는가 하면 80객 청년도 있는 법입니다.’ 김이양은 김부용의 말에 탄복하고 받아들였다.

인연을 맺은 지 15년째인 1845년 이른 봄 김이양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김부용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는데 이때 김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김부용에게 김이양은 사랑하는 남자이자 스승이었고 동지였다.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기생으로 살아야했던 김부용의 기구한 운명을 김이양은 재능을 펼치며 당당히 살 수 있도록 방패막이 역할을 해 주었다.

■ 정성수 프로필 ■

• 서울신문으로 문단 데뷔
• 저서 : 시집/공든 탑. 동시집/꽃을 사랑하는 법. 장편동화/폐암 걸린 호랑이 외 다수
•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외 다수
• 전) 전국책보내기본부장. 전주대학교사범대학겸임교수
• 현) 전라북도교육문화회관 시수필전담강사. MRA이사. 향촌문학회장.
사단법인미래다문화발전협회회장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