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수필> ‘아! 차! 풍년을 기원하는 일꾼들의 향연’

이숙진 수필가 / 기사승인 : 2017-09-26 13:39:34
  • -
  • +
  • 인쇄
소봉 이숙진, ‘풋굿 축제’
▲ 소봉 이숙진 수필가

[일요주간 = 이숙진] 동네가 들썩인다. 온 마을이 심상치 않다. 어정칠월이 지나 동동팔월에 논매기를 마치면 길일을 택한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고, 여름의 끝자락이 가을의 시작과 만나는 날이다. 마을의 안녕을 빌고 동민이 화합하는 날이다.


잔치 전날에는 설마흔쯤 된 장정들이 나와서 도랑을 치고 무너진 길을 보수한다. 길옆의 풀도 베고 샘도 친다. 샘물을 다 퍼내면 제일 약빠르고 몸집이 작은 젊은이가 겉옷을 벗고 큰 두레박을 타고 깊은 바닥까지 내려간다.


샘 바닥에 빠트린 두레박이나 잡동사니를 건져 담으면 두레박으로 올려서 걷어낸다. 구경꾼들은 그가 물이 차서 못 올라올까 봐 가슴 졸이며 안달이 난다.


그러다가 샘 바닥을 깨끗이 치우고 긴 장대에 매단 두레박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올라오면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뮈우는 맛에 그렇게 깊디깊은 곳에 들어가서 으쓱대지 싶다.


해가 한 나절가웃 자빠지면 온 동네가 깨끔해진다. 마치 더벅머리를 상고머리로 깎은 형상이다.


풋굿 먹는 날은 지글지글 감자전 부치는 소리에 침이 절로 넘어간다. 집집이 술을 거르고 떡을 빚는다. 그 시절에는 밀주 단속이 심했는데 이 무렵만은 눈 감아 준다. 밀을 디딜방아에 대충 분쇄해서 원반형으로 만들어 밀짚에 넣어 띄우면 술을 빚는 데 쓰는 누룩이 된다.


발효될 때는 시큼한 냄새가 나지만, 고두밥을 섞어서 술을 빚어놓으면 첫맛은 걸쭉한 게 텁텁하지만, 중간에 단맛이 살짝 느껴지다가 뒷맛은 깔끔한 맛있는 술이 된다. 일꾼들은 이 농주 힘으로 일한다고 한다.


풍물패 소리가 가까워지면 어머니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상차리기에 종종걸음이다. 맨 앞에 꽹과리 치는 사람, 뒤에 징을 치는 사람, 그 뒤에 북을 메고 두드리는 사람과 장구를 치는 사람이 들어온다.


큰집 머슴 또학이는 등에다 옷을 둘둘 말아 집어넣고 곱사춤을 추고, 새집 머슴 두섭이는 품바 흉내를 내며 따라오니 구경꾼 모두 배꼽을 잡는다. 춤을 너풀너풀 추면서 추임새를 넣는 옆집 아재 입은 반달이고, 어깨춤을 들썩이는 구장 아재 금니는 반짝인다.


마을 젊은이들도 어깨넘이 실력으로 탈춤을 추며 리듬을 탄다. 긴 줄을 서는 아이들은 이날이 생일이다. 동네 멍멍이들도 꼬리를 흔들며 줄을 따른다.


풍물패는 우선 툇마루에 올라서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고방 앞에 가서 한참을 신 나게 두들긴다. 다음에는 정지(부엌)로 가서 지신밟기를 한다. 주문도 외운다. 어머니도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비빈다.


마당에서 한참을 두들기면 농주와 안주와 떡이 푸짐하게 나온다. 칙사 대접이다. 한 잔씩 걸치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한 집도 거르지 않고 지신을 밟아 준다.


머슴을 두엇 두고 노적가리가 집채보다 큰 집들은 얼마씩 추렴해서 일꾼들이 먹고 마시게 해 준다. 그날 하루는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농사일은 하루 쉬게 한다.


한 해 농사에서 가장 힘든 세 벌 김매기가 끝났으니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는 뜻으로 ‘호미씻이’라고도 한다. 그 시절에는 푸리 굿과 살풀이 등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알았다. 이것이 내가 자라면서 본 안동 지방의 세시풍속이다.


경북 북부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일꾼들의 축제이기도 하다. 고문헌에는 초연(草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머슴 날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좋은 풍속이 두레가 소멸하면서 점차 사라졌으니 아까운 일이다.


▲ 안동시 제공

얼마 전 고향을 다녀온 친구로부터 요즘 안동에는 풋굿 축제가 한창이라는 말을 들었다. 고향을 가 본지가 언제였든가. 지금은 기억에도 우련하지만, 내 고향과 내 어린 시절을 너무 잊고 살았구나 하는 깨단함이 너울진다. 안동시에서 예전에 하던 것을 세밀한 고증을 거쳐 지난 2004년부터 복원하여 해마다 축제를 연다고 한다.


풍년놀이 한 마당을 시작으로 고유제를 지내고 식전 공연을 마친 후 10시 30분 쯤 개회식을 한다. 개회식 후에는 새끼 꼬기, 남녀 팔씨름 대회 등 민속놀이를 즐기고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화합의 시간을 갖는다.


부대 행사로 농 특산물 할인 판매, 일일찻집, 떡메치기 체험, 전통음식 시식도 있다고 하니 한 번쯤 때맞춰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


전국에 풋굿이 거의 사라지고 있으니 안동시에서 그나마 명맥을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이 축제는 관람이 아니라 오는 사람 모두가 먹고 마시며 춤추니 다 같이 주인이 되는 축제란다. 하긴 나도 어릴 때 농주를 한 모금씩 맛본 덕에 소주 두 잔쯤은 깔축없다.


일이 풀린다면 장삼이사 다 모이지만, 일이 꼬인다면 갑돌이, 갑순이 다 떠난다는 말처럼, 이런 축제에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면 그 지역은 이미 일이 잘 풀리고 있음이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많은 민속놀이와 축제가 있지만 이처럼 농부들이 고된 농사일을 잊고 하루를 즐기며 풍년을 기원하는 노동축제는 드물다. 이런 가치 있는 민속축제가 명맥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 논매기가 끝난 후 일꾼들이 음식을 장만해 먹고 놀 때 연주되는 농악을 풋굿이라고 한다. 풋굿은 논매기 때 연행되는 두레굿과 함께 영양·봉화·안동 등지에서 성행한다.(편집자 주)


■ 이숙진 프로필


순수문학 등단.


글마루동인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동작지부 부회장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