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을 생각하면 가슴 한 편 벅차오르고 든든해진다. 그의 수많은 업적과 함께 인간적인 성품이 멋있어 보여서이다.
2012년 유네스코는 세계 문화인물로 소설가 헤르만 헷세, 음악가 드뷔시, 자연주의 사상가 루소와 함께 정약용을 선정했는데, 한국의 위인이 선정된 것은 정약용이 처음이라서 주목을 받았다.
유네스코는 사회문제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한 학자로 다산 정약용을 인정하고, 유배생활 18년동안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부의 공정한 분배, 정치개혁 등에 관한 수많은 책을 저술한 진정성과 학자의 업적을 높이 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의 두 갈래인 경세치용(중농학파)과 이용후생(중상학파)을 집대성했고, 광주부 초부면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서 묻혔다.
그는 28세 때 과거에 급제해서 배다리, 거중기, 수원 화성의 설계와 축성, 곡산부사와 경기 암행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또 애민정신을 발휘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세 작품을 통해 조선후기에 백성을 위한 여러 각도에서 사회개혁안을 제시하고 완성했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기 위해 저술한 <경세유표>이다. 이 책은 백성을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안,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 개혁방안을 담고 있다.
저서 <목민심서>는 그가 금정찰방, 곡산부사로 근무할 때 직접 백성을 다스린 경험과 강진유배를 통해서 국가관리의 처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고 관리의 수행 덕목에 대해서 쓴 책이다.
애민정신은 <흠흠신서>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백성들이 옥사를 당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일을 없애려고 저술했다고 한다. 저서 <흠흠신서>는 살인사건과 실무지침서 등을 다룬 형법연구서이다.
당시에는 살인사건 재판을 맡은 수령들이 법대로 형벌을 부과하지 않고 함부로 시행해서 백성들이 피해를 받는 사례가 빈번했는데, <흠흠심서>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한 통치자의 덕치 규범을 명확히 규정했다.
<흠흠신서>는 수령들이 법률에 근거해 재판할 수 있도록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 나타난 유명한 판례를 제시했는데, 소송의 억울함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던 백성들의 억울한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썼던 다산의 속 깊은 의중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다산의 과학적 천재성이 빛나는 업적은 화성건설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옮기면서 축조한 화성은 화강암 대신 벽돌을 사용한 최초의 성이다.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 화성은 한국 성곽의 모든 요소를 갖춘 점이 인정되어 1997년에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다산이 거중기를 발명하여 백성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는 큰 노역을 덜어 주었기 때문에 화성축성 시기가 2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다산이 백성들을 사랑한 예는 화성건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다산은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족적인 성품도 지녔다. 유배생활 중 1810년 어느 날, 정약용의 아내 홍씨는 인편으로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폭을 보내왔다.
정약용이 혼인한 지 33년인 48세 때의 일이니, 치마의 겉모습은 세월이 지나 치마가 아니라 다섯 폭의 천이 되었고 짙은 다홍색도 황색으로 빛이 바랬다. 그는 신혼 때의 곱고 풋풋했던 아내를 떠올리면서 치마폭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13년, 이 치마폭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시집가는 외동딸을 위해 매화나무에 멧새 두 마리를 그려 넣고 시 한 수를 보탰다.
<매조도(梅鳥圖)>에는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 우리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서 쉬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라는 시를 써서 딸이 시집 식구들하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를 담았다.
매조도에는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기 전에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자애로운 성품이 잘 드러나는데 그는 인간적인 성품도 겸비한 인물인 것 같다.
정약용이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점도 참 존경스럽다. 18세기 조선의 양반이라면 모두 자신의안일만 추구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그는 달랐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애달파하듯이 그 역시 백성들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사랑한 점이 감동스럽게 느껴졌다.
다산의 재능을 아끼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총애하던 정조가 승하(1800년)하자, 안타깝게도 다산은 천주교 박해에 연루돼서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그러나 그는 유배생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육경사서(六經四書)의 경학과 경세적인 실학의연구와 저술에 심력을 바친다. 정약용은 1818년(순조18) 18년의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집에서 회갑을 맞아서 책 503권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했다.
강진에서 유배기간동안 500여권의 책을 저술한 그에게 남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유배를 가면 임금을 원망하고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세상을 탓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한탄의 세월을보내기 마련이지만 그는 보통사람하고 달랐다.
유배기간동안 결코 시련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고통을 희망으로 생각하고 후대에 훌륭한 책들을 남긴 점이 진정 멋지고 위대하다고 느꼈다. 다산에게서 강한 긍정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큰 업적은 방대하고 다양한 학문의 책을 쓴 점이 아닐까 한다. 한 사람이 한 가지 학문을 연구해서 책을 쓰기도 힘든데, 천문, 과학, 의학, 경제, 정치 등 다양한 방면의 학문에서 저술을 한 점이 대단하지 않은가.
만약에 정조가 일찍 승하하지 않고 정약용이 신유박해로 유배가지 않았다면, 당시 두 사람이 힘을 합해서 조선후기의 큰 개혁과 발전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역사를 뒤돌아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다.

서양의 문화보다 먼저 우리에게 묻혀 있는 역사와 위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조선의 위대한 천재학자 정약용이 크게 재조명 되길 기원한다.
■ 프로필
강릉 출생. 숙대 교육학과 졸업
한국예총 예술세계 수필 부문 등단(1998)
추보문학상 심사위원. 문학의 봄 편집위원
수필집 행복소나타 미돌이 이야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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