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반도체 생산라인 근로자들 림프조혈계 질환 발생률 유의미하게 높아”...2007년 6월-2023년 3월 반도체 산재 인정 96명
[일요주간 = 김성환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던 중 백혈병에 걸려 산업재해를 인정 받은 근로자가 또 한 명 추가됐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7일 삼성전자 화성 사업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식각 공정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 신정범 씨에 대해 산업재해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날 법원은 고인이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개연성을 인정했고 근로복지공단의 ‘조사없는 처분(산업재해 불승인)’의 위법성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등 발암요인들이 노출될 수 있음을 밝혀낸 조사 결과들을(국내 반도체 공장에서 취급하는 화학제품의 유해성분 비율을 분석한 2016년 연구 결과 등) 인용한 후 “망인 근무기간 동안 이러한 유해요인들이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가 없고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시행된 연구결과에서도 여전히 유해물질이 검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망인이 이 사건 사업장에 근무할 당시 이 사건 상병의 원인물질로 인정되고 있거나 상당한 의심을 받고 있는 물질들이 사용되었거나 생성되었을 높을 개연성이 존재한다”고 했다.
망인이 출입했던 ‘Sub-FAB’과 관련해서는 “전력공급 설비들이 밀집돼 있는 곳으로 순간적으로 높은 극저주파 자기장이 발생해 망인이 이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 그렇게 노출된 극저주파 자기장에 대해서도 “이 사건 상병 사이의 관련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망인이 대부분 교대근무를 하고 1주 평균 60시간 정도의 과로를 했음을 지적하며 “그러한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도 망인의 면역력에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상병의 발병이나 진행을 촉진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단함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근로복지공단이 작업환경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 노출 정도 등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만연히 망인의 작업환경이 2011년 이전의 작업환경보다 나아졌다는 것을 전제로 처분한 것을 지적하며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반도체 생산라인 근로자들에게 백혈병ㆍ림프종 등 림프조혈계 질환 발생률이 이러한 질환의 평균 발병률과 비교할 때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난 점도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데 유리한 사정으로 보인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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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 판결문. |
◇ 반올림 “근로복지공단은 ‘조사없이 불승인’ 했다”
이 같은 법원 판결에 앞서 근로복지공단은 신정범 씨의 산재보상 신청이 있은 지 4개월 만에 ‘불승인’ 처분을 내린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은 지난 13일 성명서를 통해 서울행정법원의 신정범 씨에 대한 판결에 대해 환영의 목소리를 낸 반면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에 대해서는 이번 법원 판결에 빚대어 강력 비판했다.
반올림은 성명서에서 “여러모로 문제가 심각했던 근로복지공단의 존재 의의마저 의심하게 하는 처분이었다”며 “근로복지공단은 ‘조사없이 불승인’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신정범 씨)의 작업환경에 대한 '전문조사'를 생략했다. 그 이유는 ‘2014년 입사자로 반도체 종사자 추정의 원칙에 해당하지 않으며 해당 사업장 작업환경에 대해서는 기존에 조사된 것이 있으므로’라고 했다”며 “‘반도체 종사자 추정의 원칙’이란 고용노동부가 2018년에 발표한 지침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당시 노동부는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종사자의 기존 판례 등을 통해 업무관련성이 있다고 인정된 8개 상병에 대해서는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동일 또는 유사 공정 종사여부를 조사해 판정토록 산재처리 절차를 간소화’하겠다고 했다. 기존 인정 사례들과 질병명, 담당공정, 근무기간 등이 유사하다면 ‘조사없이 승인’하겠다는 취지였다. 고인은 이 지침이 제시하는 여러 조건들에 부합했지만 ‘2011년 이전 입사자’라는 단 하나의 조건에 맞지 않았다. 공단은 그것을 이유로 ‘조사없이 불승인’했다. 지침의 내용과 그 취지를 황당할 정도로 왜곡해 버린 것이었다”고 일갈했다.
나아가 “‘기존에 조사된 것이 있으므로’라는 사유도 거짓이었다. 공단은 해당 조사 결과를 제출하라는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따라 두 건의 반도체 직업병 사건 자료를 제출했다. 한 건은 삼성전자 온양 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것으로서 고인과는 사업장 소재지는 물론 공정 자체가 달랐고(화성 사업장에는 '웨이퍼 가공' 공정이 있지만 온양 사업장에는 '칩 조립' 공정이 있다), 근무 시기(2008년 1월 ~ 2010년 10월)도 크게 달랐다. 또 다른 한건은 고인의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정 원칙에 해당하지 않고 기존 조사 자료 있음’을 이유로 전문조사를 생략하면서도 산재는 '승인'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 모두 고인의 작업환경에 대한 전문조사를 생략할 근거가 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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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진행된 반도체 관련 산업재해 현황.(출처=반올림) |
반올림은 또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가 적시한 ‘불승인’ 근거로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이 2011년 이후에는 많이 좋아졌고 ‘근무기간(1년 8개월)이 짧다’는 것이었다며 “근무기간의 경우 의학적으로도 백혈병 발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 노출 기간이라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반도체 백혈병으로 최초의 산재 인정을 받은 고 황유미 씨의 근무기간도 1년 8개월이었다. 법원은 단 10개월 근무한 노동자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기도 했었다”고 밝혔다.
이어 “두 번째 불승인 사유로 적시한 ‘2011년 이후에 입사했다’는 것이었다. 판정 위원들의 개별 심의 결과를 살펴보면 사실상 이것이 결정적인 사유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삼성 백혈병이 문제된 이후’, ‘비교적 최근’, ‘사회적 이슈화와 관련해 공정개선이 이루어진’ 시기에 근무했음이 거듭 강조됐다. 하지만 2011년 이후에도 삼성 반도체 공장의 안전보건 관리 문제가 존재했음을 드러내는 사례들이 여럿 있다”고 했다.
반올림은 “이를테면 5명의 사상자를 낸 불산 누출사고와 2004건의 산안법 위반이 적발된 고용노동부 특별감독 결과(2013년 화성사업장), 3명의 사상자를 낸 이산화탄소 누출사고(2018년 기흥사업장) 등이 모두 2011년 이후에 있었다”며 “그럼에도 공단 판정위원들은 2011년을 전후로 그 공장의 작업환경이 크게 개선됐다고 보았다. 놀랍게도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그저 안전하다고 하니 그런 줄 알라는 태도였다. 2007년에 고 황유미 님 유족이 처음 삼성 백혈병 문제를 제기했을 때 마주했던 삼성과 정부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 “고 신정범 씨 근무 공간, 각종 화학물질ㆍ가스 등 유해물질 정화하는 설비 등 밀집된 공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사망한 고 신정범 씨는 2014년 7월 삼성전자 화성 사업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설비 유지ㆍ보수를 담당했고 신규라인을 셋업 할 때는 ‘Sub-FAB’이라 불리는 공장 하부 공간에도 자주 출입했다. 반도체 생산라인에 각종 화학물질ㆍ가스ㆍ전력을 공급하는 설비와 그 생산라인에서 배출된 유해물질을 정화하는 설비(스크러버) 등이 밀집된 공간이었다.
반올림은 “생산라인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해인자들이 Top-down 방식의 환기시스템으로 인해 유입될 수 있는 곳이었고 생산라인에 존재하지 않는 유해설비들도 즐비한 곳이었다. 고전압 설비들이 많아 극저주파 자기장 노출 위험도 높은 곳이었다”며 “여러모로 반도체 생산라인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사업주의 안전보건 관리에 있어서는 사각지대에 놓인 공간이었다. 고인은 그런 곳에서 일하며 주 평균 60시간의 과로에도 시달렸다”고 전했다.
반올림은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는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서 큰 논란이 돼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묻는다. 다 해결된 문제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쩌면 고 신정범 씨 사건이 하나의 의미있는 답변이 될 수 있겠다”며 “그 공장의 많은 문제점들이 상당 부분 드러났고 그로 인해 80여 명의 반도체 노동자가 20여 개 질환으로 산재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이 사건에서 ‘2011년 이전 입사자’라는 선을 하나 긋고 고인이 그 선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사없이 불승인’ 했다. 선이 왜 그렇게 그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고인은 그렇게 같은 공장에서 과거에 일했던 노동자들의 백혈병과 자신의 백혈병이 달리 취급돼야 하는 이유조차 듣지 못한채 숨졌다”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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