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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
한글 반포 1446년, 정확히 한글 창제 580돌, 훈민정음 해례본을 반포한 지가 올해로 577돌을 맞았다. 세종 임금은 만조백관의 항변과 대국(明)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글 창제 3년 뒤 천하에 반포 결단을 내렸다. 기습적으로 반포한 훈민정음으로 문맹의 백성이 제 글(文字)을 가지게 됐다. 당시 유교와 성리학을 숭배한 조선 시대에 문자란 사대부 양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천민인 백성은 문자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나온 우리 민족은 고유의 문자 없이 중국에 사대하며 한문을 사용하여 모든 의사 표현이 기록되고 이루어졌다. 한문은 글자 자체가 어렵고 해석 또한 난해해 일반 백성은 접근이 어려운 글이다. 세종 임금은 양반과 선비들의 전유물인 한문을 쉽게 한글로 창제하여 만백성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새롭게 태어난 한글은 세계 언어 사에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오늘이 바로 577년 전 그 날이다. 이 경사스러운 날 사회 전반에 걸쳐 모국어 천시 풍조가 만연한 것을 두고 글을 써야 하는 마음이 찹잡하다.
조선시대 후반기 이후, 한글이 반포된 지 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문자는 여전히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백성이 한글을 널리 쓰기는커녕 읽기도 어려운 한문이 당시 주류사회에 범람했다. 누구나 사용이 용이한 언문도 백성의 30% 정도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자로 지냈다. 이렇게 문맹자 많은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식민지 시절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도 한 요인이다. 일제에서 해방이 되자 38선 이남에 미군이 주둔하며 이 땅에는 평생 처음 접하는 언어인 영어 바람이 불었다. 6.25 전쟁으로 배고픔에 주린 전쟁고아들은 미군들에게 떼거리로 몰려가 "헬로, 기브미 쪼코레토!"를 익히게 되었고, 도시 여자는 물론이고 저 벽촌의 아낙네들까지도 츄잉껌을 질경이며 "할로, 오케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알아듣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며 영어는 당연한 것처럼 교육이 강화되었고, 구식 언어인 한자와 신식 언어인 영어 사이에 끼어 있는 한글은 숨쉬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 지금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한글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것을 굳이 외국어를 써가며 대화하는 영어 과용 현상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지식인들의 글에서는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고, 일상의 대화에서 영어를 많이 섞어 써야 유식한 것처럼 비춰지는 세태가 세종 임금에게 새삼 송구스럽다.
작금, 우리는 왜 그래야만 하고 과연 세종대왕에게 송구스러운 게 무얼까.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외래어, 한글을 파괴하는 SNS 언어와 인터넷에 떠도는 언어, 여전히 잠재하며 통용되는 일본어 등 사회 전반에 이상한 언어가 스며들어 혼란스럽다. 곳곳 어디 빠진 곳이 없으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글로벌시대 경제개방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외국 상표들과 상품들이 범람하게 되고 '세계화'라는 구호가 모든 분야를 휩쓸게 되면서 한글의 수난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했다. 거리마다 뜻도 모를 영어 간판들이 넘쳐나고, 대중 잡지 이름이 모두 외래어이고 심지어 텔레비전 방송도 영어 이름의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났다.
그뿐이 아니다. 유치원생 어린이도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이 자리를 잡았고, 유명 영어 학원은 돈벌이를 위해 유아들 교육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아들 모집에 공을 들인다고 한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아예 이름도 영어식으로 지어 부르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섬뜩하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압하고 조선 언어를 사용하면 체벌을 가했던 일제시대의 조선의 얼 말살정책과 다를 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일제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강압이었지만 지금은 솔선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은 그렇다 쳐도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막말'은 세종 임금께 가장 면목 없는 말로 우리 사회 전방위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언어의 절제가 가장 필요한 정치인의 막말은 뉴스의 단골이 된 지 오래다. 막말 정치인은
자성은커녕 한 건 했다는 듯 오히려 자신의 소영웅주의로 치부하며 동조하는 정치인이 부지기다. 일부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무수한 막말 가운데 '인간쓰레기'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지낸 뜻은 해만 끼치고 아무 쓸모없는 이를 말한다. 근데 이 말을 자신과 적대관계에 동료 의원에게도 거리낌 없이 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치판에서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탈북민 태영호 의원을 두고 북한 정권이 인간쓰레기라며 비난하는 막말을 우리 정치인이 배워, 정책과정의 이견을 두고 인간쓰레기라는 단어 내뱉었다. 많은 국민이 지켜보는 국회에서 이래도 되는지 참 어이가 없다.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역이민하며 돌아와서 하는 말이 "왜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려고 그렇게 정신들이 없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라고 했다. 영어권에서 취업을 위해 우리나라에 온 취업생은 우리의 영어 열풍에 놀라며 "좋은 한국어를 두고 왜 그렇게 외국어를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언어는 인간을 지배한다. 영토를 빼앗긴 민족은 언젠가 영토를 되찾을 수 있지만, 말과 글을 빼앗긴 민족은 스스로 소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서 익히 경험했다. 글로벌 시대에 경제의 무한경쟁 속에 외국어가 필수의 무기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열공을 넘어선 광란적 형태는 잘못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세계화는 특정 언어에 대한 사대주의 조장이 아니며 의식의 식민지는 더구나 아니다. 세계화를 빙자한 민족어의 경시와 훼손은 더욱 아니다.
세종 대왕님께 염치 불고하고 아뢴다.
상감마마, 황공하옵게도 마마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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