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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화 시인 |
[편집자 주] 1988년 심상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로 등단했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 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평설집 『홀림 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조선시대 인물 기행』 청 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동시집 『괴물이 될 테야』 등을 출간했고, 지리산문학상, 올해의 좋은 시상, 매계문학상, 천상 병동심문학상, 시산맥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 1958년 충남 천안군 입장에서 태어났어요.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어요. 친구들과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하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어요. 당시 헤르만 헤세, 생텍쥐페리, 카프카, 다자이오사무, 카잔자키스, 도스토옙스키, 손창섭, 장용학, 서정주, 김수영 등의 작품을 읽었고, 고2 때 교내 백일장에서 운문부 장원을 하여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어요. 집 가까이 살던 박석수 시인(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등단)이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가 부인과 함께 운영하던 『현대서점』을 자주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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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일표 시인 |
그 후 오랫동안 소설을 썼고, 다시 시로 전향하여 1988년에 등단했어요. 고등학교에서 38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세 군데 시전문지의 주간 일을 병행했어요. 2020년에 정년퇴임한 후로는 주로 집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 책을 내고 나면 후련함도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위의 소개한 작품집 중 가장 의미 있는 책과 또는 작업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책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합니다.
▼ 문인들 중 자기 글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오정희 소설가는 자기 글에서 남루함이나 상투성을 발견할 때 절망적인 혐오감에 빠질 때가 있고, 허섭스레기가 되기 십상인 책에 대해서도 회의한 적이 많다고 합니다. 알베르 카뮈도 자기가 쓴 글 한 페이지를 읽으면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고, 작품이 성공을 거두면 항상 뜻밖이어서 놀라곤 했다고 합니다. 카뮈와 같은 대작가도 늘 자신은 풋내기 작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이는 생전에 문학관을 짓고, 곳곳에 자기 시비를 세우는 것은 물론 문학상까지 제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조금 더 공력을 기울였다면 좋았을 텐데, 좀 더 나은 작품으로 책을 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회의감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라면 2012년 문예중앙에서 출간한 시집『매혹의 지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 저에게는 큰 전환점이 됐던 시집이었어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롭게 시의 지평을 연 시집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시인은 항상 신생 독립국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출간했던 시집이라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 독자분들께서 선생님의 시를 읽고 ‘이것만은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시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 이면의 무늬까지 읽을 수 있는 눈 밝은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시가 어렵다고 하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시의 화법이 변하고, 발성의 방식도 달라졌어요. 과거의 독법으로 시를 읽다 보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시는 우리의 감각과 인식 체계를 흔들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합니다. 특히 요즈음 시들은 예전의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읽고 표현합니다. 생각하는 방식도, 말하는 방식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지요. 다른 것이 당연한데도 왜 시를 그렇게 쓰느냐고, 왜 우리 같은 화법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온갖 올가미를 씌워 질책하는 경우를 봅니다.
나와 달라서 틀린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것일 뿐이니 기이하다고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상한 그것이 역사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고, 문학을 바꾸는 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 그동안 여러 책들을 다양하게 내셨는데 그 중 애정이 가는 작품은 어떤 글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 조금씩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다 애정이 갑니다. 한 작품만 고른다면 2023년 제16회 올해의 좋은 시상을 수상한 ‘서쪽’을 꼽고 싶습니다.
서쪽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 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 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 최근 작업 중인 시와 또 다른 장르의 작품들에서 새롭게 탐색하고 계신 주제나 형식이 있을까요.
▼ 근래에 동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같은 시지만 동시는 매우 낯선 장르입니다. 뒤늦게 동시를 가까이 하여 보니, 요즘의 동시는 예전의 상투적이고 고루한 동시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화법, 새로운 감각의 동시, 그야말로 마술적 시간이 작동하는 매혹적인 장르였어요. 메시지 중심의 교훈적인 동시, 어른이 아이 흉내 내는 혀짤배기 동시나 코맹맹이 동시가 아니었어요. 질투가 날 만큼 좋은 동시가 많았고, 읽는 내내 몸과 마음이 맑게 정화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시를 써왔지만 동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저에게 동시는 새롭고 낯선 세계였습니다.
서툰 발걸음이지만 기존의 낡은 언어를 정지시키고, 몸에 새로운 피를 돌게 하는 매혹적인 동시, 착한 어린이표 동시나 기교와 말재주에만 기댄 동시가 아니라 당대의 정형화된 동시 문법을 갱신하면서 늙지 않는 동시, 기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늘 새롭게 태어나는 동시를 쓰고자 합니다. 능력 밖의 꿈일지 모르겠으나 이왕 발을 들여 놓았으니 아무도 발 딛지 않은 새 길을 천천히 걸어볼 생각입니다.
● 선생님의 시에서 일상적인 사물이나 풍경에 대한 사유를 깊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잔잔한 물결처럼 읽히지만 시적 의미를 들여다보면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데, 이런 사유의 힘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합니다.
▼ 라깡의 말대로 예술가는 언제나 흐름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기적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타인과 다르게 세계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관습적 사고의 틀을 깨고, 자기 갱신의 노력을 하다 보면 나만의 고유한 개성과 독창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독서의 영향도 큽니다.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 갇히지 않으려면 독서는 필수입니다. 다양한 독서 체험이 글쓰기의 큰 동력이 되니까요. 글 쓰는 사람들은 체제와 의미의 기득권에 포섭되지 않고, 호평이나 악평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 독고다이 정신이 필요합니다. 타인의 언어가 정지된 지점에서 새로운 사유가 창출되기 때문이지요.
● 시를 쓰는 젊은 작가들이나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 너무 뻔한 내용을, 너무 뻔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시를 읽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 중요한 한 방이 숨어 있겠지 하는 기대를 걸고 읽지만 끝까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잘 쓰는 젊은 시인들이 많지만 일부 시인들의 작품에서 실망할 때가 있어요. 관습적 언어 흐름을 교란시켜 사유와 감각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시일 텐데 세련을 가장한 과도한 언어 조작에 식상할 때가 있어요. 모범정답 같은 시보다는 제멋대로이면서도 매혹적인, 미지에 닿은 최초의 시를 젊은 시인들에게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아쉬울 때가 많은데 인식의 갱신 없이 포즈만 배운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문단이나 동료 시인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 원고료를 받지 못한 젊은 시인이 잡지사에 항의하여 간신히 고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심보 고약한 주인이 투정하는 일꾼에게 마지못해 떡 한 조각 던져준 꼴이지요. 시인에게 원고료는 최소한의 자존심이 걸린 일입니다. 창간한 지 꽤 되어 많이 알려진 잡지고, 재정 상태도 좋다고 소문이 난 잡지인데 왜 그런 용렬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량한 잡지를 내세워 시인의 글을 거저 갖다 팔아먹는 도둑질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뒤늦게나마 쥐꼬리만 한 고료를 받은 젊은 시인의 당당한 자존을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굴종과 비굴은 시인의 몫이 아니니까요.
이처럼 고료 지급을 하지 않는 사이비 잡지는 이상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우리 문학에 큰 기여를 한다고 떠벌리며 최고의 잡지인 양 자화자찬하며 스스로 눈이 멉니다. 새로운 문학 담론을 주도하기는커녕 타성에 젖어 별 고민 없이 책을 내면서 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함량 미달의 신인들을 대거 배출하여 돈벌이에 나서기도 합니다. 개중에는 발행인이나 주간의 글로 도배를 하는 잡지도 있어요. 대단한 용기고 대단한 무지입니다. 어떻게 이런 잡지들이 버젓이 문학지 행세를 하는지 이해불가입니다.
다행히 그들과는 달리 올곧게 잡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이의 생성 능력이 있는 그들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파수꾼이요 부박한 시속에 휩쓸리지 않고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도약하려는 창조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홍일표 시인은 시의 본질을 탐색해 온 시인으로,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통해 존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사유의 언어를 구사한다. 『매혹의 지도』는 시인 스스로 시적 전환점으로 꼽는 작품집으로, 기존 화법을 깨고 감각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인은 작업에 늘 아쉬움과 회의를 느낀다고 말한다. 이어 시인은 독자들이 시를 통해 감각의 틀을 흔드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길 바라며, 젊은 시인들에게는 미지의 감각을 탐색하길 권한다. 또한 시인은 문단의 기득권과 관습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문학의 윤리와 시인의 존엄에 대해 성찰한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일요주간 문화예술 전문 주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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