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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빛은 언제나 생명, 희망, 청결, 치유, 기쁨을 상징한다. 이와 반대로 어둠은 죽음, 절망, 고난, 상처, 슬픔을 나타낸다. 빛과 어둠 중에서 고르라면 보통은 빛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을 꼭꼭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 눈가리개까지 한 채 캄캄한 방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빛 공해’ 또는 ‘광공해’를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우리사회는 빛이 외면당하고 차단된 어둠 속에서 망령들이 돌아다닌다. 친일과 독재를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망령, 온갖 불법과 탈법을 동원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망령들로 정치와 정책은 실종된 채 마치 빛과 어둠의 세상처럼 이전투구와 막말이 지배함을 목도한다.
사회가 복잡 다양해지면서 이해관계도 첨예해지는 듯하다. 어느 순간부터 국가보다는 개인, 조직보다는 개인, 오로지 사익을 먼저 챙기려는 욕심이 여기저기서 눈에 뛴다. 이러한 욕심은 급기야 상스런 막말까지도 유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통과 공감 그리고 배려는 사라진지 오래고, 급기야 상대방에게는 상처만 준다. 품격 있는 말과 행동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미국의 소설가 에디스 워튼은 세상을 밝게 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그 하나는 불을 밝히는 초가 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군상 속 이면에는 명암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빛과 어둠이다. 자신이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공동체를 밝혀 줄 초와 거울 같은 빛이 될 것인지 아니면 존재감 없는 무의미한 삶을 지탱할지의 여부는 오직 자신의 신념과 선택에 달렸다.
우리나라는 좁은 국토에서 5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부모형제, 친구, 이웃, 동료 등 여러 인연으로 얽혀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남과 북은 이념적 대치로 70년 이상 분단국가로 나눠져 있고, 우리 내부적으로도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논리에 갇힌 채 분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힘들고 어렵게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라가 위기 때 영웅이 탄생한다는 말도 이젠 소설 속 얘기인 듯싶다. 민주화이후에 진정으로 ‘내 탓이오’ 라고 자처하는 정치지도자를 보지 못했다.
정치인은 많으나 헌신과 자기희생이 없는 부덕한 정치가 점차 이 나라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 참 정치인과 정치력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따뜻한 것이 있으면 차가운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면 싫은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양극으로 나누어져 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빛이고 어둠이고 하나의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선택하기에 달린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빛을 선택했고, 이제 모든 이원성을 초월하여 빛과 어둠을 통합해 나아가야할 때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어두운 곳도 빛을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한 단면만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볼 때 이원성을 초월한 전체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때 내 안에서 분리가 사라질 것이다.
어둠은 피하고 멀리할 대상이 아니라 안아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아직은 많은 곳이 어둡지만 내안의 빛으로 하나하나 녹여 나가고 밝힌다면 빛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 퍼져 나갈 것이다.
빛이 강할 때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이 깊으면 빛이 잠든다고 했다. 우리사회가 어지럽고 혼탁하기에 더욱 되새겨봐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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