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랏님이 덕이 없으면 하늘도 외면(尹民反政 野史)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2-03-17 14: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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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때는 병신년 2016년 12월, 북악산 남쪽 양지바른 언덕 아래 정좌한 푸른 궁궐, 그 성역(聖域)에 어두운 그림자는 온 나라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은 세월호 후유증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국정은 문고리 3인방과 시녀 최모씨가 좌, 우지 하니 엉클어졌고, 궁궐한 깊은 곳에 칩거한 고집불통 여왕은 용안조차 보이지 않으니 성형설, 혼외자 설 등 불필요한 유언비어가 저잣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당시 유림 대작들과 호위무사들은 혼란한 국정을 바로 잡기는커녕 자신들의 배 속을 채우려 친박, 비박, 진박 타령만을 하다 결국은 모두 쪽박을 찼다. 그리고 일부 비박 호위무사들은 변절하여 세파에 시달려 넋 잃은 여왕을 권좌에서 쫓아내는 반정에 가담하였고, 궁궐 앞마당과 저잣거리엔 밤마다 재야 유림들의 촛불 행사가 열려 세상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노선황(盧先皇)의 도승지 출신인 재인왕(災人王)은 선황으로부터 절대 정치는 하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 채 촛불세력과 결탁하여 거병하니, 때마침 세월호 늪에 빠져 이미 절명한 고집불통 그네여왕과 환관 3인방, 시녀 최모 여인의 목을 비틀며 정권을 손쉽게 접수하였다. 그는 일성으로 "나라다운 나라",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목청 높였으며 그날이 2017년 정유년 5월 10일이었다.

노선황의 억울한 자진에 한(恨)을 가슴에 품은 재인왕은 재임 기간 동안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며 과거 청산의 통치로 보복 정치를 하였다. 특히 승정원 입구에는 걸린 춘풍추상(春風秋霜)글귀는 타춘풍 자추상(他春風自秋霜)뜻 임에도 불구하고 고관 대신들은 국정을 '자춘풍 타추상'으로 수행하니 재인왕 재임기간 5년 동안 내로남불이 그칠 날이 없었고, 거잣거리 논객들은 자춘풍 타추상은 적반하장의 내로남불이라며 비아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예로부터 나랏님이 덕이 없으면 하늘도 외면한다는 말이 있다.
재인왕 5년 임인년 이른 봄, 임금이 德이 없어 겨울 가뭄으로 금수강산은 메말랐고, 곳곳에는 잦은 산불과 산업현장에는 많은 재난 사고가 끊일 날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오른 부동산과 그에 따른 과다한 세금 부과로 민초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대국에서 옮겨온 역병의 창궐로 저잣거리 백성은 도탄에 빠져 죽는다는 신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백성들은 재인왕이 작은 촛불로 일어나더니 큰 산불로 나라를 다 태운다며 원망하니 하늘도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우선 비를 뿌려 급한 산불은 거두었다.

그 이전, 기해년 재인왕 통치 2년, 조정 대신들과 호위무사들은 제 당파 이득을 위해서 비례대표 위성정당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법을 만들어 재야 유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위무사들을 앞세운 힘으로 밀어, 헌정사의 오점을 남기며 무지몽매한 백성의 눈과 귀를 흐리게 만들었다.

이 해괴한 법으로 치룬 호위무사 뽑기에서 180석으로 한껏 몸을 불린 따불당과 이아무개 상왕은 "천하 민심은 20년 세도는 문제가 없다"며 나라야 결단나든 내 편 챙기는 붕당정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또 국가 녹을 먹는 고관 대신들과 국회 거수기 호위무사 집단들은 어전 회의에서 '전하 아니되옵니다'는 없고, 매사 '지당한 말씀이 옵니다'로 칭송하고 연이어 문비어천가를 부르며 사미인곡을 부르고 있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재인왕은 사헌부 사관이던 尹아무개 사관을 어전으로 불러 대사헌 벼슬을 하품하며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을 쓰라 전교하였니, 그는 당시 살아있는 권력으로 최정점에 좌정하며 황세자 후임에 거론되던 曺아무개 우부승지와 그 일가족 비리를 적발해 사헌부 감찰을 하니 그는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이에 그 외척 일가와 그를 동조하는 某방송인, 某작가는 자기네 편 유림에 격문의 연판장을 돌리며 대사헌을 '배신자' '대역적'이라 모함하며 성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사헌부가 있는 서초동 마당에는 동원된 우군이 촛불로 불태웠고, 재인왕 침소인 구중궁궐 앞 광화문 광장엔 이에 맞선 백성들의 태극기가 펄럭이는 전쟁터로 천하 민심은 양분이 되었다.

이듬해 경자년 대사헌부와 형조의 마찰과 대사헌의 불충에 상왕과 호위무사들은 진노했다. 어전 회의에는 연일 들끓었고 재인왕의 명을 받은 형조판서는 나랏님의 뜻을 거역하며 거듭 상소를 올린 대사헌을 괘씸죄로 의금부에서 일부 사헌부 관원들과 결탁하여 팔다리를 자르고 탄핵하는 愚를 범했다. 어디 그뿐인가 재인왕은 위안부 할머니의 돈을 편취 한 자를 탄핵하라는 재야 유림의 요구를 무시하며 오히려 두둔해 백성을 우롱하니, 올바름과 공정을 외면하는 작태에 만백성이 분노했고, 그해 치룬 한성판윤 선거에서 도성의 백성이 일격으로 답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임금의 부덕으로 빚어진 일이다.

한편, 상왕의 일방적 지지에 세자로 책봉된 경기관찰사는 뒤집기 달인답게 비리 온상인 대장동 토건공사 비리를 재야 유림들에게 뒤집으며 장안 언론의 빈축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애마부인과 공짜 연애 사건은 세상 이목을 집중시키며 도성 호색가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고, 연이은 가족사 패륜까지 밝혀져도 아무일 없는 듯 뻔뻔함이 가히 나랏님도 놀라 입을 다물고 있다.

세자비인 횡령궁 김씨도 법인카드를 가지고 나랏돈을 자기 돈처럼 마구 퍼 쓰고 관리들을 종 부리듯이 부리고 관원인 몸종에게 사가(私家)의 잡일도 시키며 권세를 누렸다. 참다못한 관원 하나가 그들 비리를 관청에 소한 바 '관찰사와 김씨' 모두 관원 몸종을 탓을 하며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 오리발 작전으로 일관했다. 이에 분노한 저잣거리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신축년 쫓기듯 사헌부를 떠난 윤모 대사헌은 재야 유림의 젊은 당수와 연합하여 거병하니 역병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만백성이 호응하였고, 제야 선비들과 무림 고수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이에 놀란 상왕은 호위무사, 홍위병등 우군 총동원령을 내리며 세자를 도원수로 禹某 호위무사를 병마절도사로 삼아 역모를 꾀하는 배신자와 그 무리들을 토벌하기로 출병하였으나, 오위의 군졸과 도성의 백성들 모두 호응치 않은지라, 오히려 백성들이 봉기하여 연판장을 돌리며 반정 거사에 동조하였다.

민의를 앞세운 반정 거사는 궁중 호위무사들의 절대 우세에도 불구하고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날이 임인년 3월 9일이었고 역사는 그날을 윤씨와 백성이 한 몸이 되어 일으킨 '윤민반정'(尹民反政)날이라 칭했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민심은 천심이라 그 누구도 천하 민심을 거스르면 온전치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모든 정권은 어렵게 집권한 만큼 무엇보다 민심을 통치 우선으로 삼고자 해야 한다.
신시경종(愼始敬終)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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