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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중심’ 사람의 박래군 소장ⓒ이희원 |
“한국 사회 인권 아직 걸음마 단계”
경쟁이 강요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양립 어려워
사회적·물질적 토대 없이 시민 정치의 확산은 오히려 ‘허상’
시민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인권운동’을 시작할 것
[일요주간= 이희원 기자]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한다”
유엔이 선포한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의 문구다. 인권의 미개척지인 한국 사회에서 누구보다 ‘인권(human rights)’에 앞장 선 한 사람이 있다. 박 래 군. 그에 대한 설명은 한 마디로 규정짓기 어렵다. 그를 두고 ‘인권 활동가’라는 직함을 붙이지만 어떤 활동가보다 노동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권리를 찾는 데 앞장섰고 20년 가까이 뒤쳐진 한국 사회의 인권 향상을 위해 그 어떤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대로 해석하면 ‘인간의 권리’라는 인권. 그는 시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지 2년 만에 ‘인권중심 사람’이라는 터를 만들었다. 혹자는 무모한 일을 벌였다고 했다. 개관 후 12일째를 맞은 지난 10일, <일요주간>은 ‘인권’을 향해 인권 활동가인 ‘인권중심 사람’ 박래군 소장을 만나 그가 풀어갈 ‘인권’에 대한 모든 것을 들어봤다.
마포구 서교동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인권중심 사람’. 이곳의 설립부터 현재까지 ‘인권’을 향해 달려온 그를 만났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은 이 날 ‘살아있는 인권 활동가’라는 평을 듣고 있는 그에게 인권중심 ‘사람’을 기획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인권으로 무장된, 시민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인권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생각, 이에 인권의식에 대한 대중적인 기반의 대중적인 토대를 단단히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 인권중심 사람을 만들게 한 원인이 됐다.
인권중심 ‘사람’은 하나의 단체 소유물이 아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6월 달까지 시범 원칙 등을 만들고 인권강좌 등 활동 관련 교육 및 문화 활동을 계획 중에 있다. 이를 통해 시민들과 만나는 접촉면들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실천에 옮겼다”는 그는 기금모금을 시작으로 현장 활동은 제한적으로 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인권운동을 시작한 때는 지난 1994년, 인권사랑방 활동이 시발점이었다. 수도 없이 언급했을 법한 ‘인권’.
인권의 정의를 쉽게도 내리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명확하게 그 범주를 바로 말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 든다. 박 소장은 ‘인권’에 대해 이렇게 풀었다.
“수많은 권리 중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말한다. 사람의 권리가 도대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인권에 기본법이라고 정의를 두지 않는 것은 헌법에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유엔에서 정의하고 있는 세계인권선언에 이미 합의를 한 것이다. 결핍될 때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인권’의 범위를 폭넓게 잡아야한다는 그는 “예를 들면 노동자들은 노동권, 상권 등을 포함한 노동권 전반은 물론 사회보장, 교육, 교권 전반, 건강 등 모든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전반에 대한 인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이에 우리사회는 인권을 ‘이기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면서 여기서 실현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연대’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이는 결국 우리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로 인해 ‘인권’의 범주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즉, 타인이 인권침해 당하는 것, 차별당하는 것에 ‘나’는 침묵하면서 나는 인권침해 당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내가 타인을 인권침해를 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권침해에도 침묵하지 말아야하는 것 역시 ‘인권’의 이념에 포괄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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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인권중심’ 사람 전경ⓒ이희원 |
국가보안법-민주주의 ‘잘못된 만남’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인권’의 수준은 어디까지 끌어올렸을까. 그는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이며 세계인권선언의 수준이 내가 바라는 최저 수준이다”라고 운을 뗐다. “현 시점에선 여기까지 가는 것이 최선의 일이다. ‘인권’에 대한 가치에 다다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이목이 집중되는 부분이 ‘국가보안법’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국가 보안법이 존재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둘은 상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례로 미국의 경우를 들었다. 사상의 자유를 일시적 냉전시대, 예를 들면 미국의 매카시즘(McCarthyism 1950~1954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反)공산주의)선풍이 몰아칠 당시에 허용된 것일 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정의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면은 다르다는 것.
“현 사회는 어떠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소수, 비주류의 사상을 인정하는 것인데 북의 주체사상에 대한 수용, 성소수자에 대한 사상 등을 이른바 ‘종북’ 세력으로 치부하는 치졸함까지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어떠한가. 자살에 의한 사망률은 2010년 인구 10명당 33.5명으로 OECD 회원국(평균 자살률 12.8명)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 하루에 42.6명 1년에 만 오천 명이 자살하는 나라, 이것이 우리의 현 주소 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심각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게 또 현실이다. 만약 ‘나’ 나 ‘나의 가족’ 즉 나의 바운더리(boundary)가 아니라면 무관심으로 일축해버리는 행동들이 결국 ‘인권’의 지향점과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 ‘나는 아니니까’로 다수의 사람들이 침묵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8~900만 시대가 일상화가 되고 나서야 즉 비로소 내가 피해자의 입장이 되자 당면했다고 인지한다.
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이런 무모함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인권’을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에서 비롯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결국 그는 여기서 인권중심 ‘사람’의 출범 이유를 찾았다.
“발전 없이 제 자리 걸음 중인 시민들의 인권에 대한 의식을 바꿔 가야하지 않겠냐는 의문점에서 기획을 착안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경쟁 구조 속에 있는 시민들, 그들의 잠재의식을 차지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어긋난 생각을 좀 더 변화시킬 수 있지 않겠나”
여기서 그는 인권에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했다. “권력을 감시해야하고 기업을 감시해야할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권침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나 기업 등에 독립성을 갖고 즉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DJ·노무현부터 MB·朴 정권까지
안타깝게도 지난 MB정권부터 국민에 대한 억압이 강해진 분위기다. 이번 정권도 지난 정권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앞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 어느 정도 인권이 향상됐다고 보는 시각들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김대중 정권 이후 사회활동이 좀 더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 확대로 자유권이 좀 더 확보됐다고 한다면 MB정권에서 억압된 사회적 기조가 박근혜 정권까지 연장되거나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 사회적·물질적 토대 없이 이뤄지는 시민 정치의 확산은 오히려 ‘허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토대를 인권의 문화가 뿌리 내리가 어려워졌다. 김대중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양극화 현상을 불러왔고 이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등 오히려 ‘경쟁’에 앞선 문화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이후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정치적인 면에서 인권 신장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권 신장보다 ‘자유권’이 신장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후 노무현 정권 역시 권위주의 탈피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문제점이 대두됐다. 평택 미군기지 농민들 강제이주 사태, 제주 강정해군 기지 안 등만 봐도 노무현 정권이 결코 시민과 민중에 대한 ‘인권’ 신장에 앞장섰다고는 해석하기 어렵다.
두 정부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익극대화를 가져오는 신자유주의를 앞세워 여기서 빈부 격차가 극대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화됐고 자살자 역시 늘어났다. 결국 그 잘못된 토대 위에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후 어떻게 됐나. 정리해고자들이 거리로 내몰렸고 비정규직이 늘어났으며 불안정한 고용 창출로 이어졌다. 서민을 위한 경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복지에 앞장섰다지만 사회적인 불평등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로 이어지지 않았나”
그의 설명은 결국 이전 정권이 자유권을 신장시켰지만 인권의 신장에는 실패했다고 봐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추락한 진보, 재건할 길 있나
운동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권 등 사회 운동이 퍼져나갔지만 한국 사회에서 진보가 ‘상생’하지 못하는 게 현 주소다. 추락한 진보의 살아가야할 길을 제시해달라고 주문했다.
“인권이라는 것은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공동체를 만들어가자는 취지가 강한데 반해 ‘경쟁’이라는 면에서 양립하기는 어렵다. 이는 진보의 이데올로기 싸움과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정신적인 위기이자 사회적인 위기이며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오고 있다. 여기에 명확한 답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 정권의 주체 세력인 새누리당에서 ‘국민행복시대’라는 비전을 내놓으며 이를 담론으로 제시했다. 이때 진보세력은 그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종북’, ‘좌파’ 등의 색깔론만 뒤집어썼다.
그게 사실이던 아니던 그건 나중 문제다. 이른바 사회운동을 이끌어왔다는 세력이 그 기반을 잃어 버렸다. 민주 운동의 중심이라는 민주노총 역시 대중적인 운동이 아닌 ‘강성노조’를 위한 운동이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회복기보다는 이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 진보가 이끌어온 사회 운동을 대중적인 토대를 다시 만들고 기반을 다지자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붕괴를 하나씩 다져나가는 것. 이게 필요하다. 촛불집회 때 보여줬던 응집력이 결코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 다시 응집시키는 힘을 모을 때지 감정싸움에 치중할 때가 아니다. 현재 진보가 잘하고 있는 게 없다. 비단 진보만 그러한가. 정치권 전반이 취약해졌다. 진보는 특히 지반이 약해졌을 뿐 아니라 1987년 이후로 가장 진보가 바닥을 치고 있는 때, 진보가 새롭게 시작해야한다고 생각 한다”
색다른 이력의 박래군 소장
박 소장은 다른 활동가들과는 조금은 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386세대가 그러했듯 학내 시위에 참여하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4·19 데모 이후 강제 징집돼 군에 갔다. 제대 후 노동운동에 심취했지만 88년 동생(박래전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 분신하며 사망했다. 이때가 ‘인권운동’에 대한 방향성을 갖게 된 시기다. 계기라고 말하기는 가슴 아프지만 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의문사 진상 규명 등 인권문제에 앞장서게 됐다.
이렇게 ‘인권 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그가 20년 가까운 인권 운동사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를 풀어놓았다.
“현장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현장 연대 역시 주체는 그들이다.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현장에서 함께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인권 운동에 몸담은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현장이 혹은 연대가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내 개인의 생각을 강요할 순 없지 않은가. 이 시점에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내가 있어야할 자리, 내가 해야 할 역할은 현장이 아닐 수 도 있지 않나. 이에 인권중심 ‘사람’을 만들어졌고 그 곳에서 인권운동을 위한 저변을 확대시키자는 각오를 다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인권중심 ‘사람’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그간 ‘인권’을 사회 운동을 위한 매개체로만 생각했다면 이제 그 영역을 확장시키고자 한다. “단지 인권은 인권이다” 라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는 시민들에게 인권에 대한 교육 내지는 일련의 훈련 과정 등을 통해 우리가 꼭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노동 운동 등 현장에서 노동자 등 시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필요성을 많이 느꼈던 부분이다. 용산참사 등이 사회적 이슈화되면서 시민들이 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이에 인권과 시민, 그리고 현장 등의 접점을 찾고 싶다.
지난해 시민들과의 ‘인권현장기행’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 서울에서 일어났던 정부가 행했던 폭력의 현장들을 되돌아 본 바 있다. 이를 좀 더 확장시키려고 한다. 인권의 살아있는 교육이랄까?(웃음) 결국 글로 배우는 ‘인권’보다는 체험하는 ‘인권’교육을 실행하고자한다. 인권을 통해 시민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 한다”
인터뷰 말미에 박래군 소장을 정의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인권에 대한 희망은 계속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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