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주간 = 송기옥 칼럼니스트] 간재(艮齋) 전우(1841-1922)의 초명은 경륜(慶倫), 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추담(秋潭), 구산(臼山)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대한제국의 거유(巨儒)로써 일제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하라며 학문과 도로써 백성을 깨우치고 후학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한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충신이며 문신(文臣)이다.
담양 전(田)씨의 연원(淵源)은 중국 진(陳)나라 전완(田完)의 후손인 전횡(田橫)이 제(濟)나라 말 한나라 장수 유방에게 참패하여 몰리자 BC672년경 바다건너 우리나라 어청도, 고군산군도 망명설이 있다. 그의 시조는 전득시(田得時)로 고려 의종(1115년)때 문과 장원급제하여 좌복야, 참지정사를 역임, 시호는 충원공(忠元公)으로 담양군(潭陽君)에 봉했다.
간재는 전주시 서문 밖 청석리에서 부 재성(在聖)의 아들로 출생, 13세에 4서3경을 깨우치고 14세 때 서울로 이사를 하여 20세에 초,중과에 오른 수재였다. 21세 때 당대의 거유(巨儒)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로 아산의 임헌회(任憲晦)와 사제의 연을 맺는다.
고종 19년 선공감역,강원도도사,사헌부장령,순흥부사,충추원찬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관직에는 연연하지 안했다. 1894년 전봉준 녹두장군은 썩어빠진 탐관오리들을 징치하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갑오민중혁명이 이 고장을 시발로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 다음해 을미년에는 국모시해라는 일제의 만행인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병신년에는 일제에게 쫓겨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관에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나라는 풍전등화 격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 을사오적 매국노들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몇 차례나 올렸으나 허사가 되니 1910년 경술의 국치로 나라를 일제에게 강탈당하자 간재는 제자들과 론의 끝에
‘도가 행하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는 공자의 뜻을 받들어 서해의 절해고도 위도의 왕등도와 고군산군도의 신시도 등에서 3년간 거하다가 뱃길이 너무 험하여 1912.9.25에 부안의 계화도에 정착하여 10년의 여생을 마칠 때까지 북간도에서부터 제주에 이르기 까지 전국적으로 제자 가 되겠다고 몰려들어 3000여명의 제자와 간재 전집 6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전국에서 계화도에 몰려든 도포를 입은 학자들이 하루에도 100여명에 이르니 수용을 다 못해 계화도 장자동에서 양지마을로 옮겨 13채의 학당을 지어 졸지에 학자촌이 되었다.
그의 좌우명으로 ‘만겁종귀 한국사(萬㥘終歸 韓國士) 일생추부공문인(一生趨附孔門人)-만 번 겁탈하여도 끝내는 한국 선비로 돌아갈 것이요, 일생을 공자의 문에 붙여 살리라’라는 배일사상의 글귀를 기둥에 써 붙여 제자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군함이 계화도에 들이닥쳐 함장(艦長)이 간재를 찾아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만 그 글귀를 달라고 하였다.

간재는 ‘너희 천황은 그 애비를 죽인 죄인이요, 이등박문은 군왕을 죽인 죄인으로 천벌을 받아 마땅하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세계평화를 어지럽히느냐? 당장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이것이 우리 황제의 뜻이며 온 나라 백성의 뜻이니라.’
너희 천황에게 전하라며 글귀를 주니 고이 싸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내무대신 박영효는 전우를 조선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수구당의 괴수라며 죽여야 한다고 주청을 하였으나 고종은 ‘내 어찌 올곧은 선비를 죽일 수 있느냐’며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을사늑약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조국강토를 도적질해 가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 글이나 읽으며 대적할 생각은 않느냐며 각계에서 간재를 비판하는 소리가 컸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생명을 걸고 일제와 싸웠는데 특히 호남의병을 주도한 최익현과 임병찬과는 대조적으로 간재는 공자의 예와 도로써 제자들에게 배일사상을 주지시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정신무장을 하게 한 것이다.
그의 학풍은 이율곡의 기호파로 이어 받았는데 김장생-김집-송시열-김창협-권상하-박현원-홍직필-임헌회-전우를 끝으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동일하다는 낙론(洛論)계열의 학자였다. 또한 이이의 심도기주(心導氣主)를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여 성존심비성륜심제(性尊心卑性錀心弟) 등 새로운 성리학 용어를 제창했다.
특히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하여 낙론계(洛論係)를 한층 더 발전 시켰다.
1922.7.4일 82세로 천명을 다하니 전국에서 몰려든 조문객이 수천에 달했으며, 그의 묘는 익산시 삼기면 현동 후록에 있다.
1920년 채용신이 계화도에 찾아가 간재초상화를 그렸는데 경남유형문화재 540호로 지정, 김해 월봉서원(月峯書院)에 봉안되었다. 간재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한 부안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와 고창의 용암사(龍岩祠),정읍의 태산사(台山祠),의령의 의산사(宜山祠)등 사당을 지어 매년 제를 올리며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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