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주간 = 배남효 고전연구가] 고대 중국의 주나라 왕조가 쇠약하여 BC770년에 수도를 동쪽인 낙읍(洛邑)으로 옮기는데, 이때부터 동주(東周)라고 부르며 역사적인 춘추전국시대(BC770-BC221년)가 시작된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부인 춘추시대(BC770-BC403년)에는 아직 주나라를 왕실로 인정하면서, 제후들간에 경쟁하여 가장 강한 제후국의 군주가 패자(?者)로 올랐다.
역사적으로 춘추시대에는 다섯 명의 제후가 맹약을 맺으면서 패자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들을 춘추오패(春秋五?)라고 불렀다.
춘추오패는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의 순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는 전국시대로 넘어가 더 이상 패자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첫번째 패자인 제나라 환공(桓公)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나오고 있고, 또 열국지나 다른 역사서에도 나오고 있다.
또 환공을 도와 패자의 지위로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하가 바로 재상 관중(管仲)인데,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환공과 관중 두 사람이 맺어지고 활약하는 이야기는 아주 드라마틱한데,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면서 재미도 있어 제왕학(帝王學)의 좋은 소재가 된다.
특히 환공의 인간적 스케일과 관중의 정치적 재능은, 패업의 군신이라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만큼 튼튼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여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환공과 관중이 처음 군신의 관계를 맺는 일도 아주 극적인데, 왕위 승계 과정에서 관중은 다른 왕자의 편에 서서 경쟁자인 환공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관중은 제나라로 귀국하는 환공을 죽이려고 매복하여 기다리다 활을 쏘아 암살을 시도하였는데, 다행히 환공은 위기를 모면하고 먼저 귀국하여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관중은 왕위 계승 싸움에서 패배하여 환공의 포로가 되어 죽을 고비에 처하는데, 환공의 측근이자 친구인 포숙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명받게 되었다.
포숙은 환공에게 제나라로 만족한다면 자신과 같은 신하로도 충분하지만, 천하의 패자가 되려면 관중같은 뛰어난 인재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환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이 괘심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포숙의 말을 받아들여 관중을 용서하고 과감하게 재상으로 발탁하게 되었다.
환공은 관중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중부(仲父)라고 부르면서까지 힘을 실어주는데, 환공이 스케일이 크고 도량이 넓은 리더쉽을 가졌음을 잘 알 수 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패자의 지위로 올리는 활약은 사기 관안열전에도 나오는데, 관중의 탁월한 정치적 재능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 관중의 저서 관자(管子)를 인용하여 관중의 정치 철학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함을 냉철히 꿰뚫어 보고 있다.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위에서 법도를 지켜야 6친(六親, 부 모 형 제 처 자)도 사랑으로 단결하고, 사유(四維, 예 의 염 치)가 신장되지 않으면 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된다.’
또 관중이 백성의 뜻과 요구에 따르면서 그 눈높이에 맞추어 균형을 잡고, 물 흐르듯이 정치를 잘 해나갔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물이 근원에서 나와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민심에 순응하였다.
?따라서 그 이론은 비근(卑近)하고 실행하기에는 쉬웠다. 백성들의 풍속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해주었고, 백성들의 풍속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제거해 주었다.
그가 정치하는 방법은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켰다.
?사물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중시하여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신중을 기했다.’
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서부터는 정치를 관중에게 일임하여, 자신은 편안하게 나라를 다스리면서 부국강병을 이루어 끝내는 패자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관중은 환공을 패자에 이르게까지 하면서 정치 리더쉽의 교육을 계속 하는데, 여기에 관한 재미있고 교훈적인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환공이 관중에게 제나라가 아직 어려운데, 신하들의 수레와 의복이 너무 사치스러워 문제가 많으니 금지시키고 싶다고 그 방법을 물었다.
관중은 신하들이란 위에서 임금이 하는 행실을 보고 따라하기 마련인데, 임금이 최고급 옷에 산해진미를 즐기니 신하도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하였다.
신하들의 사치를 고치려면 임금이 먼저 자신부터 사치와 방탕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간언하였고, 환공은 관중의 말을 받아들여 검소한 생활로 바꾸게 되었다.’
‘환공이 연회를 베풀다 과음을 하여 정신이 흐트러져, 쓰고 있던 관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였다. 환공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관중에게 군주의 체면을 되세울 방법을 물었다.
관중이 백성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줄이는 선정을 베풀어 실수를 만회하라고 간언하였고, 환공이 그대로 실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우리 임금이 술취하여 다시 관을 잃어버리면 좋겠다고 하였다.’
‘환공이 관중과 함께 마굿간을 지나가다 인부들이 나무 담장을 수리하는 것을 보았다.
?환공이 관중에게 담장을 수리하는 일중에 어떤 일이 가장 어렵냐고 물었다.
관중이 담장의 밑에서부터 똑바른 나무를 가지런히 놓아야 높게까지 안전하게 쌓는데, 중간에 비뚤어진 나무가 놓이면 나무를 높게 쌓아가기가 힘들다고 답하였다.
관중은 조정에 인재를 쓰는 일도 마굿간의 담장을 쌓는 일과 같아, 똑바른 인재를 차근차근 기용해야 조정이 잘 돌아갈 수 있다고 비유로서 간언하였다’
‘환공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 장공이 견디지 못하고 땅을 주기로 하고 화의를 청했다. 환공이 장공과 회맹하여 땅을 받는 서약을 맺으려는데, 노나라 장수 조말이 단상에 뛰어 올라와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고 땅을 되돌려 달라고 위협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공은 그렇게 하겠다고 언약을 하였고 조말은 물러났다.
환공은 화가 나서 언약을 무시하고 조말을 처벌하려 하자, 관중이 주는 것이 얻는 것이라고 하면서, 언약을 어기면 신의를 잃고 천하의 버림을 받게 된다고 환공을 설득하였다.
환공은 분노를 참고 관중의 말에 따라 땅을 돌려주었고, 이 일로 환공은 천하의 신의를 더욱 얻게 되었다.'
이처럼 환공과 관중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나라를 잘 다스려 왔는데, 관중이 연로하여 죽음에 이르자 환공이 걱정이 되어 후임자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이 자리에서 관중은 사람의 행실에 따라 본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예리하게 인물평을 하면서 환공에게 경계심을 말해주고 있는데, 두사람의 대화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환공이 관중에게 뒤를 이을 적임자가 누가 좋은지를 묻자, 관중은 임금이 신하를 더 잘 알 것이라 하면서 그 의중을 먼저 밝히게 하였다.
그러자 환공이 역아가 어떠냐고 묻자, 요리사로서 군주의 환심을 사려고 자기 아들까지 죽여서 바쳤는데, 아들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임금을 진심으로 모실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불가하다고 답했다.
환공이 다시 개방이 어떠냐고 묻자, 환공을 15년 섬기는 동안에 한번도 부모를 찾아간 일이 없었으니, 부모도 모시지 않는 자가 어찌 임금을 잘 모실 수 있겠느냐면서 불가하다고 답했다.
환공이 다시 수조가 어떠냐고 묻자, 벼슬을 하려고 거세까지 하여 환관이 되었으니,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는 자가 어찌 임금의 몸을 아낄 수 있겠느냐 하면서 불가하다고 답했다.
다시 환공이 포숙을 거명하자, 포숙은 호오(好惡)를 분명히 드러내고 포용력이 약한 군자라서, 복잡한 정치를 조정하는 재상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답했다.
환공이 습붕을 거명하자, 습붕은 지우침이 없이 공정하고 융통성도 있으니, 자기 뒤를 이어도 무난한데 명이 길지 않아 문제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관중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제방의 뚝이 되어 물이 넘치지 않도록 잘 막아왔는데, 자신이 죽고 나면 그 뚝이 터질까봐 염려가 되니 환공에게 사람을 잘 써라고 당부하였다.’
관중이 죽자 환공은 그의 말에 따라 습붕을 후임으로 기용했는데, 습붕도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아 후임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환공은 관중의 말을 잊고 역아와 개방과 수조 세 사람을 중용하여 정치를 맡기게 되었는데, 이들이 욕심을 드러내고 전횡을 하면서 국정이 어지러워졌다.
이 세 사람은 주로 환공의 오락을 담당하면서 환공을 즐겁게 해주고 벼슬을 했는데, 관중이 국정의 중심을 잡고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중이 죽고 중심이 사라지자 이들이 난신(亂臣)이 되어, 왕위 후계 문제까지 개입하면서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환공도 세상을 떠나게 되어, 제나라 궁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파벌이 갈라져 내란이 일어났고, 그 바람에 환공의 시체는 2개월 이상이나 방치되었다.
시체에는 구더기가 들끓었고 장례가 제대로 치뤄지지 못해, 한때 중원의 패자였던 환공도 신하를 잘못 기용한 탓으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환공과 관중의 이야기를 다 읽게 되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정말 너무나 잘 맞고 가슴에도 바로 와닿는 것을 느낀다.
환공은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인 관중을 포용하여 중용하는 인사를 잘 하여,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키웠으며 천하의 패자가 되는 영예까지 안게 되었다.
반면에 역아 개방 수조 같은 난신들을 기용하는 인사를 잘못하여, 환공은 죽고나서 시신도 수습이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을 당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어졌던 왕위 다툼으로 제나라는 국력까지 흔들려, 다시는 중원의 패자를 넘보지 못하게 되는 커다란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아마 지하의 관중이 이런 환공의 비참한 말로와 제나라의 혼란을 보았다면, 자신이 40여년 힘들여 쌓은 공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허망함을 느끼고 통탄해 마지 않았을 것이다.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어지는 것은 잠깐인데, 인사를 제대로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환공의 성공과 실패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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