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가 휴전하는 이유

이지민 수필가 / 기사승인 : 2018-06-18 1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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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수필가
이지민 수필가

[일요주간 = 이지민 수필가] 동호인끼리 함께 하는 무량사 여행이 내일로 다가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충청 일원의 왕릉이나 박물관과 같은 다른 문화유적지는 몇 차례 다녀왔어도 이곳은 처음이다.


기대와 설렘으로 들뜨기도 했지만 갈 길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여행 작가들의 팸 투어는 거의 서울에서 버스로 출발한다. 한 시간밖에 안 되는 거리를 서울로 가서 일행과 합류하기엔 갑절의 시간을 허비할 것 같다. 그렇다고 차를 갖고 가면 일행과의 단체행동이 어렵다. 버스를 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걱정만 하다 그만 날이 밝았다. 새벽안개가 축축하다. 뺨을 때리고 도망가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자우룩한 안개다. 시름을 한 짐 더 얹었다. 버스 편을 알아보다가 시간은 지나고 동동거리기만 한다.


어쩐 일일까. 내 맘을 알았나. 생각지도 않았던 한솥밥 먹는 아이들 아빠, 즉 나의 까칠한 A형 남편이 어인 일인지 태워 주겠다고 길을 나선다. 직장이 그쪽 방향이니 조금 일찍 출발하면 된다고 했다. 표정도 없고 감정의 무게도 없는 말투다.


여행을 싫어하는 진정한 남의 편인 남편과, 전국에 발자국 남기는 것을 사명이라도 되는 듯 돌아다니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행을 같이 한다 해도 출발 5분 만에 어김없이 다툼으로 분위기를 망치기 일쑤였다. 함께 여행한 게 언제인지, 오늘 아침 안개처럼 아득하다. 유배 가는 선비를 따르는 노비의 맘이 이런 마음일까. 차라리 평소처럼 서울을 가서 일행과 같이 내려올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옷섶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고추바람이 옷깃을 더욱 잡아끌게 만든다.


늘 무뚝뚝하고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반응 없는 남편이 내겐 너무나 힘든 사람이었다. 최근 더욱 감정의 골이 깊어진 탓에 며칠을 서로 무시하며 없는 듯 사는 중이었다. 어머님의 다리 수술과 퇴원 후 거취문제, 시아버님의 장례 후 첫 명절을 지내며 불거진 상속 문제, 장손며느리의 의무만 주고 무심한 시댁식구들에 대한 불만 등으로 서로 팽팽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남편이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와 소리 없이 잠자리에 들었던 날이었다. 술 냄새와 함께 구겨진 셔츠에 화장품 냄새가 배어 있었다. 다음날 부부동반 모임에 가면서도 침묵이 익숙한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차 바닥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귀고리 한 짝이


었다. 누구 것이냐고 따져 묻기에도 촌스러워 그냥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궁금함보다는 정당하게 미워할 구실을 주는 데 감사했다.


사람의 마음은 유리그릇과도 같다. 고흐의 일화를 책에서 읽었다. 어느 날 고흐가 창가에 앉아 길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하는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지나갔다. 포장용 천으로 사용했던 흔적은 천에 새겨진 글자들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잘 깨짐 breakable>이라고 씌어 있었다. 고흐는 ‘아하! 사람의 마음은 깨지기 쉬운 존재로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그 사람의 등에는 <취급주의 be careful>라고 새겨져 있었다. 고흐는 또 무릎을 쳤다. ‘맞아 사람의 마음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거야.’


결혼 생활도 유리그릇과 같다.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깨지고, 무심한 말 한마디에 무너져 서로 할퀴게 된다. 유리의 본능은 속이 맑고 투명할 때 가장 아름답다. 우린 서로를 들여다보는 것에 인색했다.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유리그릇은 깨지면 못 쓰게 되고 그 조각은 사람을 다치게도 한다. 조각조각 맞춰 억지로 흉한 꼴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상처를 견디는 쪽의 몫이다. 부모는 조각을 피해가는 피곤함을 아이들에게 지워준 공범이기도 하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 외에는 그 무엇도 없이 살았던 것 같다. 대화의 축도 주제도 아이들이다. 부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만 존재했다. 작은애를 대학에 보내고 난 후 다니던 직장을 관두었다. 전쟁같이 치열했던 일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여행 본능은 턱까지 오른 마라톤에 대한 보상이고 쉼표였다.


책임감, 앵벌이, 며느리노릇, 투명 인간, 그리고 귀고리 등 최근 생각해야 할 일들이 십자낱말 풀이하듯 복잡하다. 그리고 안개만 채워지면 더 집요하게 따라 다니던 나의 선택에 대한 궁금함. 그런 단어들로 머릿속을 채우다 보니 어느새 논산을 지나 부여로 접어들었다.


“무량사가 외져서 버스 타고 가기엔 힘들어. 혼자 차 갖고 왔어도 찾기 어려웠을 거야. 부여 끝자락이라서.”


한 시간 동안 운전만 하던 남편의 첫마디다. 인색한 말투다. ‘당신이 고생할까 봐 태워주는 거야.’ 라고 하면 마지못해 고마워하기라도 할 텐데. 살갑게 얘기하면 큰일이라도 날까 두려운 건지. 웬 지형 탓은.


그 말은 사실이었다. 부여 시내를 가로질러 시골길을 한참 곡예 하듯 굽이굽이 지나야 했다. 어스레한 안개에 호락호락하게 제 몸을 내보이지 않는 좁은 길이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만수산 끝자락을 돌고 돌아 손에 꽉 쥐어진 안전띠의 감각이 무뎌질 즈음 한적한 곳에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그 뒤 조용히 숨어 있던 무량사를 만났다. 혼자 왔으면 헤매며 쩔쩔매고 있을 것도 같았다.


오늘처럼 안개가 이렇게 몸서리쳐지는 날이면 난 절대 운전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남편을 선택해 결혼을 결정하고 그와 헤어진 날도 날선 안개가 뼈 깊숙이 헤집고 갔었다. 집 앞에서 새벽안개와 뒤범벅되어 흐느끼던 그의 어깨를 끝내 외면하던 그날도 이젠 잊고 싶다.


그는 딸 많은 집 오 남매 중 장남이었다. 그의 집은 주방도 없이 바닥에 앉아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곳 자취방에서 그는 여동생들과 뒤엉켜 살고 있었다. 대학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하며 다녀야 했던 나는 무서웠다. 그 자취방을 드나들며 닳아버린 문지방이 익숙해질 즈음, 라면으로 고픈 배를 달래는 것이 더 이상 재밌지가 않았다. 앉은뱅이책상 위 라면냄비가 깔고 앉은 전공책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옆방의 속삭임을 막아내지 못하던 얇은 판자벽처럼 미래가 쉬 뚫려 구멍이 날 듯 불안했다. 앞날은 점점 피어나는 곰팡이에 점령된 낡은 벽지처럼 느껴졌다. 손에 끼워진 실반지를 하수구에 던지고 남편을 만났다. 맞선본 지 이백 일도 안 되어 결혼했다.


남편은 초등학교 동창인 여자 친구와 군 복무 중 백 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했었다고 했다. 상병 휴가 나온 날부터 연락이 끊어졌고, 결혼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제대 후였다. 그녀가 임용시험 합격 후 1년을 기다려 발령받은 날부터 연락은 끊어졌고, 같은 학교의 동료교사가 그녀의 배우자라고 했다. 그녀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내게 던지던 스스로의 질문을 남편도 가끔 해 보는 걸까.


“다 왔어.”


건조한 목소리에 밖을 내다보았다. 일반 사찰이 깊은 산중에 터 잡은 것과 달리 무량사는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입구의 푸르른 소나무 숲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절이 나타났다. 숲을 지나는 동안도 안개는 우리 사이를 여전히 맴돌았다. 천왕문을 지나 절 뜨락에 발을 내딛으니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의 무량사가 조금씩 다가온다. 여행자들을 태운 버스가 조금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추우니 차에서 기다려.”


마누라 추운 걸 언제부터 걱정했다고. 자기 몸 갈무리나 잘 하지. 쿨룩거리며 남편은 기침을 했다. 며칠간 술을 마시더니 고질병인 기관지염이 또 도진 모양이다. 차 밖으로 나왔다. 동호인들이 오기 전에 여기저기 좋은 사진 구도를 찾아놓기 위해서다. 무량사에 대해 얼마나 아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처음 온 곳이기도 하지만 사전 조사를 못한지라 약간은 궁금함을 내비쳤다. 남편의 폭넓은 상식이 방금 검색창을 뒤진 듯 놀라웠다. 누구랑 여길 다녀가기라도 한 걸까.


화엄사의 각황전, 법주사의 대웅전과 함께 무량사의 극락전은 3대불전으로 불리는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다. 신라시대 때 창건한 고찰로 한이 없다는 ‘무량無量’과 아무걱정 없는 세상 ‘극락極樂’이 만난 곳이다. 극락전 뜨락에 오층석탑과 석등이 보물의 귀품을 다소곳이 담고 있다.


석등은 연꽃으로 장식한 하대석에 팔각기둥을 세운 전형적인 부여의 석등이다. 이 팔각은 원에 이르기 전 깨달음의 상징이다. 둥근 원이 깨달음의 상징이라면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무량사 석등도 깎임을 인내해 온 결과물이다. 깎임이 때로는 은혜로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곡선에 내 맘도 ‘무량’과 ‘극락’으로 다듬질 될 수 있기를 손 모아 본다.


드디어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참, 경화가 병원 갈 때 이 차에서 귀고리를 잊어버렸다던데, 찾아봐도 없네.”


아가씨의 유방암 조직검사 때 얘기를 하는 듯했다. 말끝을 흐리다가 더 이상은 묻지도 않았고 나도 대답을 않았다. 주머니 속 만지작거리던 귀고리가 두근거리며 솔기 사이로 더욱 숨어들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사진기를 들고 이리저리 구도를 궁리하다 보니 손이 곱아 비볐다.


“사진기 들고 오는 사람이 손 시릴 줄 몰랐어?”


준비성이 없다는 둥 잔소리다. ‘손 시리지?’ 하고 따뜻하게 말하면 두드러기가 나는 건가 .


“출근시간 한참 지났어, 얼른 가.”


서운함에 욱하고 튀어 오르려는 걸 꾹 참고 갈 길을 채근했다. 그 순간 호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휙 던져준다. 멋쩍은지 서둘러 차에 탄다. 놀란 나는 ‘고마워’ 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그냥 감추고 말았다. 이미 차는 성냥갑 만하게 작아졌다.


무량사는 어느새 여행자들의 경쾌한 사진기 셔터소리로 채워져 갔다. 초겨울 아침 산사의 볼을 얼리던 찬바람은 어디로 갔나. 바람이 깔아놓은 나뭇잎 갈색 양탄자가 일렁인다. 새들의 재잘거림이 사랑스럽다. 햇살이 소리 없이 안개를 뒤춤 속에 가두려 애쓰고 있다. 안개가 서서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새색시의 버선코처럼 곡선이 고매한 무량사 대웅전의 추녀가 수줍게 안부를 물어왔다.


카랑카랑한 바람이 아직 완전히 잦아들진 않았지만 무량사의 뜨락은 참 따뜻하다. 남편이 던지고 간 가죽장갑이 참 많이 낡았다. 그러나 곱은 손을 덥히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오늘의 무량사는 더 이상 춥진 않다.


마루에 걸터앉아 배흘림기둥을 쓰다듬어 보았다. 극락전의 특징 중 하나다. 구조상의 안정과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심미적인 착상에서 나온 건축법이다. 기둥의 아래위 끝을 가늘게 해서 안정감을 주는 양식이다. 우리 부부 사이에도 이런 착시현상을 교정해주는 우리만의 심미적인 교정기교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어본다.


휴대전화의 자판을 누른다.


‘도라지 넣은 배 즙 김치냉장고에 있어.’


내일은 동태찌개를 끓여야겠다. 남편이 좋아하는 미더덕을 넣는 일을 잊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휴전도 가끔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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