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 시인의 작가 초대석] 파리의 이방인, 신혜진 작가에게 듣는 『퐁퐁 달리아』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6-09 11: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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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이은화 시인, 신혜진 작가


▲ 이은화 시인
[편집자 주] 1973년 충주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창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단편 '로맨스 빠빠'로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은 작품을 계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 『퐁퐁 달리아』, 『벌레들』(공저), 『인생손님』(공저) 등을 펴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다.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귀한 지면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가 신혜진입니다. 2007년에 등단하고 책을 여러 권 출간했어요. 그림책이 가장 많고 소설책도 있습니다만 시간이 꽤 흘러 얼른 다음 책을 내야 합니다.

●파리에서의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파리로 온 지 벌써 5년이나 흘렀네요. 타국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지만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며 지내요. 며칠 전에는 대사관에 가서 대통령선거 재외국민 투표도 마쳤습니다.


프랑스어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로 왔는데 지금은 프랑스인 친구들도 사귀고 예술학교에도 다니고 있습니다. 올 4월에는 세월호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기획해서 진행하기도 했어요. 관객들이 많이 오셨는데 한국인, 프랑스인이 반씩 섞여 있었어요. 프랑스를 알아가는 동안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한국을 알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공부도 하고 일도 합니다. 프랑스어가 어려워서 고생하고 있고, 칼럼도 쓰고 학생도 가르칩니다. 프랑스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어요. 외국인으로서 먹고사는 일이 만만치 않아 생계를 위해 청소 노동자로도 일하고 있지요. 과외나 청소를 하면서 생긴 일들을 칼럼에 쓰기도 하고 소설 소재로도 씁니다.

●파리에서의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 신혜진 작가
▼코로나 때가 기억납니다. 세계인 모두가 겪은 힘든 시기였잖아요. 헌데 파리는 아주 긴 기간 동안 완전히 봉쇄됐었어요. 파리에서 코로나시기를 온전히 겪은 한국인은 많지 않을 거예요. 많은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한국으로 피난 갔던 때였으니까요. 파리 아파트가 대개 작은 편이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산책이 가능한 시골로 떠나기도 했다더군요.


봉쇄 기간에는 비행기나 기차만 멈춘 게 아니라 아예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어요. 정부 사이트를 통해 허가증을 발급받아 서류에 적힌 장소와 시간에만 외출이 허용되었어요. 성당조차 문을 닫아 결혼식, 장례식은 물론 미사도 없는데 가끔 느린 종소리가 들리곤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조종이었어요. 상업시설 대부분 문을 닫았고, 직장, 학교 모두 정지상태였는데 개인적인 불행까지 겹쳐 정말 괴이한 광경을 많이 봤어요. 2차 대전 홀로코스트를 피해 숨어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불안했겠구나 생각을 자주 했어요.


하루는 정부 기관에 가느라 통행증을 발급받아 시내 중심가로 가게 됐어요. 기관사 없이 달리는 무인 지하철에 혼자만 타게 됐어요.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내릴 때까지 끝내 아무도 타지 않았어요. 아무도 타고 내리지 않는 지하철에 혼자만 있었다는 게 비현실적인 기억인데 그때의 CCTV를 돌려보면 가오나시나 서양의 각종 유령들로 객실이 만원이었던 건 아닐까 상상하기도 합니다.


봉쇄가 저녁 6시 통행금지로 완화된 후 박물관이 재개장했을 때 혼자 루브르에 가보기도 했어요. 연간회원권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못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관람객보다 직원이 더 많은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었어요. 유유자적 루브르를 산책했어요. 어마어마한 조각과 그림들이 나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토록 많은 유물들이 전부 내 차지였지만 전혀 신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언젠가 소설로 쓸 생각입니다.

●한국과 파리에서의 글을 쓰는데 있어 정서적 차이는 어떤가요?


▼여행자로 파리에 왔을 때는 세느강변의 음악가와 연인들, 몽마르트 언덕에서 베레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똑같은 길고양이도 파리에 사는 애들은 낭만고양이처럼 보였죠. 파리의 자연은 문화적인 유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 박물관 카드를 만들어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박물관에 수시로 들르곤 했어요.


지금은 박물관이나 연주회, 고풍스러운 건물과 세련된 파리지앵보다 동네 서점이 안정감을 줍니다. 놀랍게도 파리는 동네 서점이 살아있어요. 일을 마치고 침침한 가로등이 켜질 때쯤 동네 서점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작가 사인회나 낭독회를 종종 만납니다. 큰 창밖에서 그런 풍경을 보게 되면 그렇게 안심이 됩니다. 동네 도서관이 사랑방 노릇을 하기도 하고요. 그럼 프랑스에서 작가 노릇하면 살림살이 좀 나아지겠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파리 8대학 문창과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두 명은 프랑스인이고 한 명은 한국 유학생이었는데 학생들이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더군요. 신춘문예처럼 대대적인 등단제도가 없는 프랑스에서는 작가가 되는 관문이 더욱 높습니다. 8대학 문창과 학생들은 소설가인 내게 어떤 희망을 가지고 질문한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답을 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문학적인 글을 쓰는 일은 밖에서 보기에는 고상한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현실은 고단합니다. 특히 전업 작가의 영역에서 문학이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느낍니다. AI를 이용한 창작이 수준 높은 결과물을 생산하는 시대이므로 이 추세는 더 가팔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파리 8대학 문창과 학생들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면 꼭 문학만 고집하지 말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 작가도 상 타기 전에는 책이 안 팔려서 부업을 했습니다. 부업으로는 문창과 교수만한 게 없으니 우선은 열심히 공부하고 쓰라고 말입니다.

●소설 『퐁퐁 달리아』는 발랄하고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책을 낸 뒤 시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작가님이 자신의 책을 리뷰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면 이 또한 색다를 것 같습니다.


▼<퐁퐁 달리아>는 단편소설 7편을 엮은 소설집입니다. 주인공들은 재벌집 막내아들이거나 못해도 천재 의사거나 초능력 하나쯤 감춰두고 사는 인물들과는 거리가 진짜 멉니다. 나의 주인공들은 재벌집은 구경도 못해본 평범한 주부, 천재 의사는커녕 취직도 못해서 우물쭈물 낙향한 취준생, 초능력은 없어서 못 쓰고 사채나 끌어 쓰는 도박꾼 같은 엑스트라 인생들입니다.


나의 주인공들은 지질한데 유쾌하고, 재벌은 아닌데 떵떵거리며 살며, 잘못을 저지르지만 끝까지 뻔뻔하지도 못해서 짠하고, 상황이 대단히 안 좋지만 그럴수록 농담을 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엑스트라입니다. Extra는 프랑스에서 잉여가 아닌 ‘특별한, 최상의’ 존재를 말할 때 쓰입니다. 제가 쓴 소설이지만 아무튼 명작이니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책에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중 소설 속 한 부분 소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코 푼 휴지뭉치 같은 것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탁구공만 한 휴지뭉치는 매우 꼬질꼬질했다.
“아잉아, 이게 뭔 줄 아느냐? 한번 맞춰 보거라.”
아버지답지 않게 퍽 엄숙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버지 손바닥에 있는 휴지를 집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른 손을 치우며, 기양 맞춰 보라니께, 한다. 나는 아무래도 휴지 속에 뭘 감추어 놓은 듯해서 빼앗으려고 했고, 아버지는 내 손을 피해 휴지 든 팔을 허우적댔다. 뭐야, 금반지라도 주웠어?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그러엄? 그냥 코 푼 거 아냐?
“비슷하게 맞추었다. 이것은 아부지으 눈물이다. 새벽기도 때마동 느이덜얼 위하야 월매나 월매나 간절허게 기도를 허는 중 아느냐?”
아버지는, 아느냐? 하는 대목에서 짐짓 목소리를 떨기까지 했다.― 「로맨스 빠빠」 부분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시던 아빠가 떠오릅니다. 아빠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첫 소설책이 출간됐을 때 무척 기뻐하셨는데 저는 등단이나 책이 출판된 사실보다 아빠가 기뻐하시는 게 더 기뻤습니다.


돌아가신 지 몇 년 흘렀지만 가끔 아빠가 보내주신 맞춤법 틀린 문자들을 열어봅니다. 문자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 드린 후 아빠는 가끔 “헤진아 바부냐 전화 해거라” 같은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진순이가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다”처럼 복잡한 건 사진을 찍어서 보내시고 말이지요.
「로맨스 빠빠」를 장편으로 쓰려고 플롯을 잡아두었는데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써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께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어릴 때 집 마루에 장롱보다 큰 보루네오 책장이 있었어요. 짙은 밤색 선반에는 의학서적, 종교서적, 백과사전 전집 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 옆 작은 책꽂이에는 동화책 전집이 있었고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 책 많은 집이 흔치 않았어요. 책이 귀해서인지 소중하게 보관했고, 책장에는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유리문도 달려 있었어요.
하루는 엄마가 책장 유리문을 열고 마른걸레로 먼지를 닦으면서 말씀하셨어요.
 

“책 안에 보석이 들어 있다.”
이 책 저 책 열어봤지만 보석 같은 건 없었어요. 엄마 거짓말쟁이! 하니까 엄마는 더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물론 찾을 수 없었어요. 속은 게 약이 올라서 엄청 울었어요. 그런데 보석 대신 책 속에 재미난 그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아직 글을 읽지 못했지만 그때부터 뼈나 장기가 그려진 인체 해부도와 백과사전 속 사진들을 펼쳐놓고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어요. “책 안에 보석이 있다, 더 찾아보라”는 말씀이 가끔 생각나요.


요즘 사람들은 책보다 영상매체에 더 익숙해서 어쩌면 종이책은 곧 사라질 거라고들 합니다. 저도 한국에서 출판되는 책들은 e-Book으로 읽고, 극장보다는 OTT 콘텐츠가 가까운 현대인입니다. 마차가 사라지자 마부가 사라진 것처럼 책이 사라지면 작가들이 사라질 수도 있겠네요. 마부는 운전사가 됐고, 이제는 자동차가 정말 자동으로 달리는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운전사라는 직업은 다른 이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파리에 아직 ‘굴뚝청소부’가 있는 것 아세요? 겨울에 파리 골목을 걷다보면 연기가 낮게 깔리며 나무 타는 냄새가 날 때가 있어요. 파리 풍경을 자세히 보면 전통 아파트 지붕 위에 점토로 만든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벽난로에 장작을 때는 집이 있나 보더라고요. 굴뚝이 남아 있으니 굴뚝청소부가 필요한가 보더라고요.


발표지면이 없더라도 고독하게 쓰는 작가들을 존경합니다. 그런 작가들은 그을음으로 막혀버린 굴뚝같은 세상을 청소하는 사람들이지요. 글을 쓰거나 청소할 때마다 상반된 두 가지 일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작가를 청소부로 비유하는 건 좀 너무한가요? 그럼 한 글자씩 보석을 깎아 책속에 새겨 넣는 세공사들이라고 해두죠. 웬 보석이냐고요? 책을 펼쳐보세요. 책 안에 보석이 들어 있습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일요주간 문화예술 전문 주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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