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00조 가계빚과 954만 명의 은퇴가 겹치는 한국
은퇴를 앞둔 지인들을 만나면 이야기가 늘 비슷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연금은 얼마나 나올지, 일을 그만두고 연금을 받기 전까지는 무엇으로 버틸지. 몇 분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집 한 채가 전부라고요. 처음에는 개인의 걱정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숫자를 들여다보니 한두 사람의 걱정이 아니었습니다.88.6%. 국제결제은행(BIS)이 내놓은 우리나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입니다. 2019년 3분기 이후 가장 낮지만, 같은 표에서 한국은 44개국 중 여섯 번째로 높습니다. 좋아졌다는 말과 여전히 위험하다는 말이 한 숫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뒤쪽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 장부에 없는 1,000조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빚이 있습니다. 전세보증금입니다. 세입자가 맡긴 돈이니 집주인에게는 돌려줘야 할 빚인데, 개인 간 거래라는 이유로 가계신용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매일경제와 한국경제연구원이 추산한 지난해 전세보증금은 약 1,006조 7,000억 원으로, 2018년보다 37.7% 늘었습니다.
공식 가계신용 1,930조 원에 이 돈을 얹으면 3,000조 원 안팎, GDP의 150%를 넘습니다. 추산 방식에 따라 숫자는 달라지겠지만, 빚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결론은 같습니다.
그 빚을 받치고 있는 건 땅입니다. 가계 자산의 75.2%가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이고, 이듬해 조사에서는 75.8%로 더 올랐습니다. 미국은 30%대, 일본은 40%대입니다. 집값이 오르는 동안에는 모두가 괜찮습니다. 멈추는 순간 모두가 함께 흔들립니다. 집 한 채가 전부라는 말은 푸념이 아니라 통계입니다.
◆ 스페인은 모범생이었다
2007년 스페인의 정부부채는 GDP의 36%였습니다. 유럽의 우등생이었지요. 그러나 부동산 거품이 터지자 은행이 휘청했고, 구제금융을 쏟아붓는 사이 국가부채는 2014년 100%까지 치솟았습니다. 민간이 진 빚을 나라가 통째로 떠안은 겁니다.
우리의 일반정부 부채는 IMF 추산 54.4%라 안전해 보입니다. 하지만 금융권의 부동산 PF 익스포저는 아직 168조 8,000억 원입니다. 스페인이 36%였을 때 누가 걱정했습니까.
일본은 금리를 0%로 내려도 아무도 돈을 빌리지 않았다
집값이 크게 떨어지면 가계는 하루아침에 빚이 자산보다 많아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벌어도 쓰지 않고 빚부터 갚습니다. 리처드 쿠 박사가 '대차대조표 불황'이라 부른 이 현상 속에서 1990년대 일본은 금리를 0%로 내려도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일본에 없던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시간이 훨씬 빨리 간다는 것입니다.
◆ 우리 시계는 더 빨리 돈다
통계청은 65세 이상 인구가 2025년 20.6%로 올라 초고령사회에 들어서고, 2050년에는 40%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까지 일본은 10년, 미국은 15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7년입니다.
이 숫자에 얼굴을 입혀 보면 2차 베이비부머, 1964년부터 1974년 사이에 태어난 954만 명입니다. 전체 인구의 18.6%입니다. 우리 경제의 허리를 지탱해 온 세대가 줄줄이 일터를 떠납니다. 한국은행은 이 은퇴가 경제성장률을 최대 0.4%p가량 끌어내릴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문제는 떠난 뒤입니다. 중장년이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는 평균 49.4세,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10년 넘게 소득이 비는 구간이 생깁니다. 그 구간을 건너게 해 줄 자산은 대부분 집입니다. 한 민간 조사에서 1968~74년생 직장인 자산의 83%가 부동산이었습니다. 이 세대가 생활비를 위해 한꺼번에 집을 내놓는 날이 온다면 집값은 어떻게 될까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볍게 넘길 질문은 아닙니다.
◆ 연금 곳간, 시간은 벌었지만
국민연금도 같은 시계를 보고 있습니다. 손대지 않으면 2041년에 적자로 돌아서 2055년에 기금이 바닥난다는 것이 정부 추계였습니다. 2025년 개혁으로 소진 시점은 2064년으로 늦춰졌지만, 국민연금연구원은 추가 개혁이 불가피하다며 건강보험과 조세, 고용정책까지 함께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시간을 벌었을 뿐, 숨을 돌린 것은 아닙니다.
곳간이 비면 누군가는 채워야 합니다. 현역 세대가 더 내거나, 나라 살림이 메우거나입니다. 가계빚, 전세, 연금은 따로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인구 구조 위에 놓인 하나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한국에만 있는 전세가 도미노의 첫 칸이 됩니다. 깡통전세가 터지면 집주인의 보증금 반환 불능이 세입자의 대출 부실로, 은행의 대출 축소로, 소비 절벽과 건설사·PF 붕괴, 일자리 상실로 번질 수 있습니다. 스페인이 겪은 일과 일본이 겪은 일이 한꺼번에 닥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 지금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성장으로 빚을 녹이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남은 길은 충격을 줄이며 천천히 내려오는 연착륙입니다.
첫째, DSR 예외를 정리해야 합니다. 전세자금대출과 정책모기지를 규제에서 빼주는 한, 갚을 수 있는 만큼만 빌린다는 원칙은 구멍 난 채로 남습니다.
둘째, 국가가 갭투자의 위험을 대신 지는 구조를 손봐야 합니다. HUG의 전세반환보증이 100조 원 규모에 이르렀습니다. 월세 기반의 장기임대 시장으로 천천히 옮겨 가지 않으면 전세보증금 1,000조는 결국 재정의 짐으로 돌아옵니다.
셋째, 자본시장을 믿을 만한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배구조 개선, 소액주주 보호, 배당과 자사주 세제 정비로 돈이 땅이 아니라 기업으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넷째, 연금과 일자리를 한 장의 그림으로 다시 그려야 합니다. 정년과 고령자 고용, 퇴직연금과 개인연금까지 묶어서 은퇴가 '소득 절벽'이 아니라 '완만한 내리막'이 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나라의 돈 쓰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당장 박수를 받는 인기영합적 지출은 환호로 끝나지만, 청구서는 다음 세대에게 넘어갑니다. 아이들의 교육, 청년의 일자리, 생산성을 높이는 연구와 기술에 쓰는 돈은 당장은 티가 나지 않아도 훗날 곳간을 다시 채우는 씨앗이 됩니다.
◆ 맺으며
이 문제는 가계의 장부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교사 부족, 과도한 수업 시간, 불평등한 대학 입시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아이들이 내건 것은 불편함의 호소가 아니라 배울 권리와 미래의 기회였습니다. 뿌리를 따라가 보면 국가가 교육에 투자할 재원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현실에 닿습니다. 곳간이 비면 가장 먼저 줄어드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돈을 쓰느냐가 곧 아이들이 어떤 청구서를 받느냐입니다.
빚으로 쌓은 잔치가 끝난 자리에는 늘 청구서가 남습니다. 그 청구서가 지금 우리 식탁 위에 놓여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스페인의 길도, 일본의 길도 피하려면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래시계는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일요주간 / 박덕수 칼럼니스트 happyworld5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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