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㊼] 청포도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8-11 10: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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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은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여름입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지요. 그런데 이맘때면 벅찬 기쁨이 오히려 애상감으로 밀려오곤 합니다. 시인이 살아있을 무렵 만약 일제의 억압이 없었다면 「청포도」는 얼마나 상큼하고 행복한 시였을까요. 시인이 그토록 그리던 광복, 기다림이라는 말에 마음이 설렙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좋은 그릇을 꺼내고 향 짙은 차를 정성스럽게 우려내는 일, 어쩌면 바로 그 시간은 우리가 시 속의 화자가 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시인은 선비이자 지사의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따뜻한 상차림으로 그를 맞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해 봅니다. 고봉의 하얀 쌀밥과 시원한 오이냉국, 큰 조기 한 마리와 아삭한 겉절이. 하루만이라도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처럼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 이불을 준비하고 싶은 여름입니다.

나라를 잃어본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어요. "나라를 잃으면 안 된다. 나라가 없으면 서럽다"라고요. 직접 겪어본 서러움에서 나온 애국심이었지요. 그런데 언제쯤이면 나라가 국민을 걱정하는 여름이 올까요. 시 속의 그 하얀 돛단배는 아직도 멀리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청포도」를 통해 우리에게 기다림과 맞이함의 소중함을 전하고 있으니까요. 그 믿음이 있었기에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겠지요.

우리 삶은 크고 작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천천히 우러나는 차의 맛처럼, 사랑도, 꿈도, 성취감도 모두 기다림에서 깊어지지요. 우리 8월만큼은 소중한 사람을 맞듯 이 시에 담긴 시인의 마음을 맞아보면 어떨까요. 언젠가는 나라가 국민을 걱정하는 그런 따뜻한 여름이 오기를 꿈꾸면서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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