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이일우
바람이 책장을 들춘다.
마디마디 박힌 음운音韻
곧게 빼물어서 싸한 절구
볕 밝은 글 읽는 소리다
눈감으니 매 맞는 소리다
숨죽이니 피 뱉는 소리다
속이 비어서 더 야무진 너는
싸락눈 퍼부어도 거침없는 외침이다
두 마디 대통술을 마신다
이마를 두드리는 죽비 소리
별똥이 쏟아진다
댓잎 원고지 칸칸이 괴는 말들
비문秘文을 받아 적고 싶어서
너의 문하門下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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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화 작가 |
“속이 비어서 더 야무진 너”라는 이 동양적 사유가 담긴 역설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무언가 비우고 내려놓을 때 더 단단해지는 걸 경험하잖아요. 욕심을 비우고 아집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강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어 “이마를 두드리는 죽비소리”에 순간 “별똥이 쏟아진다”니,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요. 선불교의 깨우침이 우주적 현상과 만나는 찰나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은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람이 전하는 은밀한 소리를 받아적고 싶어 “너의 문하에 든다”라는 결구는 글 쓰는 이의 겸허한 자세와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거든요. 절실한 마음이 있다면 어디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무엇이든 펜이 될 수 있지요. 대나무 잎사귀와 돌과 허공도 원고지 칸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작은 소리 하나에서도 깊은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마음을 본받고 싶은 여름.
그냥 지나치던 바람 소리에도 이토록 많은 시적 언어가 담길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평범한 순간을 특별한 의미로 변화시키는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과 깊은 사유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네요. 이 시는 무한한 상상을 열어주는 선물 같습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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