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㊻] 대숲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8-07 13: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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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이일우


바람이 책장을 들춘다.
마디마디 박힌 음운音韻
곧게 빼물어서 싸한 절구

볕 밝은 글 읽는 소리다
눈감으니 매 맞는 소리다
숨죽이니 피 뱉는 소리다

속이 비어서 더 야무진 너는
싸락눈 퍼부어도 거침없는 외침이다

두 마디 대통술을 마신다
이마를 두드리는 죽비 소리
별똥이 쏟아진다

댓잎 원고지 칸칸이 괴는 말들
비문秘文을 받아 적고 싶어서
너의 문하門下에 든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대숲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여름 오늘은 더위를 식혀줄 대숲을 만나보려 해요. 유년 댓잎들이 바람에 스치던 소리는 날을 벼리는 듯 날카롭게 들렸지요. 서늘하게까지 들리던 기억을 되살리는 시. “마디마디 박힌 음운”에서 대나무의 마디를 소리의 단위로 표현한 시인은 “곧게 빼물어서 싸한 절구”에서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을 시의 형식과 연결합니다. 자연의 형태가 문학의 언어로 변화하는 순간이지요.

“속이 비어서 더 야무진 너”라는 이 동양적 사유가 담긴 역설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무언가 비우고 내려놓을 때 더 단단해지는 걸 경험하잖아요. 욕심을 비우고 아집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강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어 “이마를 두드리는 죽비소리”에 순간 “별똥이 쏟아진다”니,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요. 선불교의 깨우침이 우주적 현상과 만나는 찰나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은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람이 전하는 은밀한 소리를 받아적고 싶어 “너의 문하에 든다”라는 결구는 글 쓰는 이의 겸허한 자세와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거든요. 절실한 마음이 있다면 어디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무엇이든 펜이 될 수 있지요. 대나무 잎사귀와 돌과 허공도 원고지 칸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작은 소리 하나에서도 깊은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마음을 본받고 싶은 여름.

그냥 지나치던 바람 소리에도 이토록 많은 시적 언어가 담길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평범한 순간을 특별한 의미로 변화시키는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과 깊은 사유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네요. 이 시는 무한한 상상을 열어주는 선물 같습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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