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주간 = 김쌍주 대기자] 8000만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에서 아버지 안봉훈,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아래로 여동생 안성녀,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 등 3남1녀의 가족이 있다. 광복 60년의 그늘 속에 묻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안중근 의사 여동생 고 안성녀 여사 묘가 부산 남구 용호동 소재 천주교회 묘지(용호동 산232번지 일원)에 안장돼있다.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고 안성녀 여사는 오빠인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10.26의거를 이룬 이듬해인 1910년에 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데리고 북만주로 망명했다. 고 안성녀 여사는 그곳에서 항일운동가 권승복(1920년 사망)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권두선, 권계선, 권 헌, 권봉선 등 3녀1남을 두었다.
그 후 고 안성녀 여사는 한국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아들인 권 헌 씨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으며, 고 안성녀 여사를 누님으로 불렀던 리승만 전 대통령과 백범 김 구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 청파동과 쌍림동에서 살다가 6.25가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 외동딸인 안현생은 서울 아현동에서 살았고, 부산으로 피난을 온 고 안성녀 여사는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살다가 신선동 산비탈에 정착하여, 새 본적지로 정해 살던 중 195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가족들은 1974년 부산 남구 대연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고 안성녀 여사의 묘를 현재의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회 묘지로 이장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이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고 안성녀 여사의 묘비(사진 참조)가 그동안 방치돼오다 2016년 처음으로 부산 남구청에 의해 40여 년 만에 벌초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부산 남구청은 지난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회 묘지에 안장돼 있는 고 안성녀 여사의 비석을 정비했다. 기존의 시멘트비석과 상석을 걷어내고 높이 0.9m짜리 오석으로 만든 묘비와 0.43m의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고 안성녀 여사의 묘소가 행정적 지원을 받은 것은 1954년 4월 사망 이후 6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비석 앞면에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여동생 안성녀(루시아)의 묘’라는 글귀가, 뒷면에는 고 안성녀 여사의 공적과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부산 남구청은 또 주변 잡목을 제거하고 묘지 진입로 제초작업을 하는 등 주변 환경도 정비하고 관리 중에 있다.
고 안성녀 여사는 오빠인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뒤 곧바로 중국으로 도피해 해방 직전까지 독립운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항일운동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모든 항일운동가의 자손들이 해방 후에도 어렵게 살아오고 있듯 이들 안중근 의사가족들 역시 숨어살면서 가난에 허덕였고, 중국·한국·러시아·미국·일본 등지에서 이산가족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살던 중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고 안성녀 여사의 아들 권 헌 씨가 일가족을 찾으면서 핏줄들을 찾게 됐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을 대신해 침략자 그리고 전 세계에 나라의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전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독립의지를 담은 외침을 토해냈다. 이후 재판과정에서도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의연함을 보였다. 안 의사는 독립군의 장교로서 교전 중 적장을 사살한 것으로 살인자가 아님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은 안 의사의 재판을 서둘러 마쳐야 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저항하는 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를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그들의 침략행위가 더 알려지는 일이 초래됐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철저히 불공정한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1살의 젊은 나이에 안 의사의 삶은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옥중에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정리해 집필하는 열정을 보였다.
당시 안 의사를 감시하던 감옥의 간수들조차 안 의사에게 감복했음은 익히 전해진 일화다. 그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기록들은 지금도 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109년의 세월의 더 흘렀다. 안 의사의 사후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우리민족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조선의 독립을 외쳤고 이후에도 일제의 억압 속에도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도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안중근 의사가 염원하던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졌지만, 대한민국은 수많은 격동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그 시련의 역사를 넘어 지금의 대한민국은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소망했던 독립된 조국에 묻히는 일은 지금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 후 안 의사의 유해가 있는 장소를 철저히 숨겼다.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장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수 있고, 안 의사의 정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두려웠을 지도 모른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지만, 원하는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안중근 의사의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에 가묘상태로 남아있다. 안 의사는 여전히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신 안 의사의 정신은 계속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10월 26일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언론이나 방송 매체에서 큰 언급이 없다는 현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향했던 안 의사의 총알은 또 다른 일제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향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이 의거를 더 기억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상세히 알려야 하는 건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와 친일의 역사를 향한 강한 경고와 함께 후세의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더 발굴하고 알리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나라의 전통성을 바로 세우고 우리가 불의에 저항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소재 안중근 의사 교육문화재단을 비롯한 안중근 의사 정신문화협회, 고 안성녀 여사 수훈자촉구추진위원회 등 안중근 의사 관련 사업관련단체에서는 오는 2월 14일 부산시 남구청 대강당에서 “제2회 2.14 도마 안중근의 날 제정 기념행사 및 안성녀 여사 수훈자 촉구결의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에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잃었고, 이후 친일파들의 협력 속에 정부의 기능을 하나하나 일본에 내준 상황이었다.
여기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에 저항했고, 고종은 헤이그 특사파견을 통해 국제사회에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열강들이 주도하는 국제정세에서 조선의 외침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었고,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일본의 조선침략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1대 통감을 지내기도 했다. 이토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고 독립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들에게는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8000만 민족의 영웅 도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10.26의거를 이룬지도 벌써 10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고 안성녀 여사의 손자인 권혁우 광복회부산지부 남부연합지회장은 “할머니가 1954년 돌아가신 뒤로 관심에서 멀어졌다”며, “그나마 최근에 부산 남구청에서 독립영웅의 혈육에 대한 예우를 해줘 감사하다”라는 말만 짧게 했다. 조국의 독립 영웅의 후손이 남긴 말의 뉘앙스가 안타깝게 다가왔다.
우리는 언제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선열들과 그 유가족들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줄 날이 올지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다. ‘이게 나라냐’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다.. 친일세력들은 지금도 우리사회에서 활개를 치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희생된 유가족들의 삶은 과연 어떠한가. 이제 양심 있는 국민들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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