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거로운 일상을 잠재우는 비가 내리니 사방이 가지런해진 오후다. 소리 없이 세상을 적시면서도 소란스럽지 않은 비를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느슨해진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에도 눈길이 머문다. 가을비는 사람을 조금은 센티멘털하게 만든다.
퇴근길에 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프레이로 뿌리듯 가늘게 내리는 비가 머리칼과 옷깃을 시나브로 적셨다. 우산이 없는 나는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리려다 생각이 멈추었다. 코끝에 스치는 비 냄새가 발길을 붙잡았다. 어차피 비를 맞게 된 것, 오늘은 그냥 걸어 보자. 우산을 사는 대신 비를 맞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조금 낭만적일 것 같았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어디선가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가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느다란 빗줄기와 노래, 그리고 혼자 걷는 길. 잠시나마 세상일에서 비켜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 기분이었다. 낭만이란 별것 아닌 데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낭만에도 현실은 따라붙었다. 비는 생각보다 점점 많이 내렸고, 어느새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멋지게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을 상상했는데, 실제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에 가까웠다. 머리도 젖고 신발도 젖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몸은 축축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비를 맞으며 걷는 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가슴 한구석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때 그 자리를 채웠던 사람과 시간, 함께 웃고 마음을 나누던 순간들이, 그때는 그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고, 사라진 뒤에는 그때의 감정까지 함께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기억은 뜻밖의 순간에 되살아났다. 비 냄새 하나, 노래 한 소절이 오래된 시간을 불러내기도 한다.
지나간 것들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 시절에 느꼈던 기쁨과 설렘, 무언가를 기다리던 마음은 지금의 나에게도 남아 있다. 다만 일상에 쫓기느라 들여다보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걷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나이 들어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다가, 문득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다. 비어 있는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지나온 날들을 그리워하는 데 머물지 않고, 남은 날들에 새로운 기쁨과 아름다움을 보탤 수는 없을까.
그제야 낭만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낭만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나 젊은 날의 추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상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도 낭만은 생겨난다. 남들은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에 마음을 주고, 평범한 하루에서 숨겨진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다. 때로는 현실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 보기도 한다. 그 장면 속에서 나는 구경꾼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다.
물론 현실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고, 내가 겪는 일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해 주지도 않는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런 날들이 쌓이면 삶은 어느새 해야 할 일과 감당해야 할 일로만 채워진다. 살아가는 일은 계속되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바라며 사는지는 잊기가 쉽다.
낭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 팍팍하다고 해서 삶의 의미까지 팍팍할 필요는 없다. 세상이 내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내 삶에 이야기를 보탤 수 있다. 평범한 하루를 조금 특별하게 기억하고, 지나간 시간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자신을 속이자는 뜻이 아니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 다른 가능성을 남겨 두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마음의 여유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굳어진 생각을 유연하게 바꿀 줄 아는 융통성도 있어야 한다. 낭만은 주어진 환경이 넉넉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사치가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생긴다. 같은 비를 맞고도 누구는 불편함만 느끼고, 누구는 오래 잊었던 노래 한 곡을 떠올린다. 비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른 것이다.
비를 맞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계절도 시월 하순이다.
돌아보면 올 한 해도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마음을 많이 썼다. 무엇이 옳은지, 누구의 주장이 그른지 판단하느라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웠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보다는 집단의 논리에 눈길을 주었다. 나름대로 세상을 바로 보려는 마음이었겠지만,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몰두하느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내 마음은 얼마나 들여다보았을까.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집 앞이다. 문을 열면 다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할 것이다. 빗속에서 누리던 낭만도 현실의 문턱을 넘어서면 조금씩 희미해질 것이다. 그래도 오늘의 비는 그냥 지나간 비가 아니었다.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한 실수 덕분에 걸음을 늦추었고, 걸음을 늦춘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과 마주했다. 노래 한 곡에 마음이 움직였고, 평범한 퇴근길에서 내 삶의 빈자리를 생각했다. 어쩌면 낭만은 특별한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은 삶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어진 날들을 해야 할 일로만 채우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비를 맞으며 걷고, 낯익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오래된 기억을 꺼내 볼 수 있는 엉뚱한 여유를 가져야겠다. 세상이 정해 놓은 의미만 좇지 않고 내 삶에서 발견한 작은 의미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말이다.
비는 그쳤을까. 집 안으로 들어선 후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오늘은 비를 맞고 걸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ch25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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