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두화의 대가인 고홍선은 판소리(중요무형문화재), 서예, 조각 등에서도 탁월한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한 마디로 종합예술인인 셈이다. 기(氣)가 발산되고 수맥을 차단하는 신비한 작품을 만들고 우리나라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고홍선의 집은 유별났다. 집 입구에서부터 ‘일반인이 사는 곳이 아니요’라는 느낌을 준다.
고홍선의 손길이 묻어나는 그림과 글씨가 그의 집 담벼락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황토로 만든 조그마한 토굴에는 그의 작품들이 널려 있고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청가 고홍선의 신비한 작품

“예부터 글씨에서 기가 나온다 했다. 글씨는 뇌하고 많이 연관이 되어있다. 먹으로 글씨를 쓰면 심장을 뛰게 만든다.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 글을 써서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게 했더니 몸이 나았더라 하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홍선은 지두화나 악필 서체를 집안에 걸어 놓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 집안의 우환을 없애고 병을 치료해준다고 했다. 그가 그린 지두화(指頭畵)와 그리고 그가 쓴 악필 서체의 작품들은 이러한 신비함을 경험시켜준다.
현재까지 그의 작품을 소장한 우리나라 사람은 8,000여명정도다. 그의 작품을 통해 불면증을 치료한 대구에 사는 정씨는 잠자는 자리에 수맥이 흘러 잠을 자고 나면 몸이 몹시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는데 글 한 점을 받아 방에 걸어둔 후로는 아프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고홍선은 글을 쓸 때 현재 상황과 글을 써주는 사람의 이름, 사주까지 보고 거기에 맞는 글귀를 써 준다고 했다. 그는 악필(握筆)서체를 구사한다. 일명 청가체라고 불리며 두 자루 이상의 붓 자루를 꽉 쥐고 한 번에 써내려가는 독특한 서체다. 잔잔한 불가를 틀어놓고 그가 붓으로 글씨를 써내려 가는 모습에서 신명이 느껴진다. 또 그는 공연을 할 때면 퍼포먼스를 가미한 발가락 붓글씨도 선보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생겨났으며 청나라 초기 유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 조선시대 활동했던 현재 심사정(沈師正)이나 최북, 허유 등의 그림에서 지두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고홍선은 “지두화의 시초는 저작거리(시장)에서 천민들이 손끝으로 그림을 그리며 퍼포먼스와 행하면서 시작됐다”며 “천민들이 글을 못 쓰니 수많은 퍼포먼스를 했고 양반들은 천민들이 손으로 그린그림이라며 취급을 하지 않았다. (지두화는) 마음에 흥이 넘쳐나면서 손에서 전율이 전달되고 손을 움직여 춤을 추면서 그린 퍼포먼스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두화에는 알 수 없는 기가 나온다’고 유홍준 선생님 책에도 기록돼 있다”며 “하지만 누구에게나 (손가락에서) 기(氣)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숙련을 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두화(指頭畵)는 흥(興)·한(恨)·끼 모여 이뤄진 종합예술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난 고홍선 은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능했다고 한다. 특히 지두화는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 가장 애착을 간다고. 그는 자기 내면에 흥이 돋지 않으면 그리지 못하고 한이 스며들어 있어야 하고 끼가 있어야 지두화를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고홍선의 퍼포먼스가 가미된 지두화 공연을 보고 있으면 흥이 절로 난다. 그는 어깨를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장구를 두드리면서 그림까지 그린다. 의제 허백련 선생에게 동양화를 배웠다는 그는 처음으로 지두화를 접한 것이 20년 전 서울 인사동 어느 이색적인 전시회 였다고 회고했다. 산수화 같기도 한 그림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거칠게 그렸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큐레이터에 물어보자 이것이 손으로 그린 그림 즉 지두화라고 설명을 했다고 한다.
고홍선은 “당시 큐레이터는 400년 동안 이런 그림을 그려왔는데 이제는 맥이 끊어지고 하시는 분이 없다. 가끔 서양화 쪽에서 손과 나이프를 터치해 그리는 기법으로 그리는데 이것은 지두화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지두화를 운명적으로 만난 게 된 계기였다.
현재 지두화를 그리는 사람은 북한에 1명, 일본에 1명, 중국에 4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두화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고홍선에게 제자양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손끝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지금 내 아들이 그림에 소질이 있고 내가 하는 것을 많이 봐서 내 아들이 지두화를 이어가지 않을까.”
그는 “꼭 내가 아니더라도 지두화는 사람마다 얼굴, 손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그림이 나온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에게 배웠으면 한다”며 제자 양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췄다. 또 그는 “엄지, 검지, 소지, 약지, 중지를 쓰는데 각각 쓰는 방법이 다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중에서도 약지가 가장 중요하며 없어서는 안 될 도구다”고 설명했다.
그의 스승이자 동양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 선생이 제자로 입문한 고홍선이 9살 되던 해에 호를 청가(푸른 청, 집 가)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의미는 '임금이 사는 곳이 청와대 이니 임금을 그리는 휼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호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문화 전 세계 알려야

그는 호남의 소리꾼 심청가 예능보유자(단제) 오병수 명창으로부터 단가와 심청가를 사사했고 장성해 진봉규 명창, (인당)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춘향가를 사사해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 한국 풍수지리 역술인 협회 회장을 지내고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이병철 삼성 창업주 등 많은 정·관계 지인들의 자문을 받은 청오 지창용 국사를 7년간 따라다니며 관상학, 풍수지리학, 역학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지두화는 완벽하면서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고려청자가 귀족 같은 것이라면 지두화는 토종 된장 같은 거칠고 와 닿는 것이다”고 지두화 예찬론을 폈다.
또 “지두화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우리 문화는 대단한 것이다”며 “한민족은 한, 흥, 끼가 많다. 이 문화를 세계에 알려지길 바란다”는 바램을 전했다.
이어 “유건을 쓰는 선비문화는 안빈낙도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며 “선비는 가난해야 되고 글을 항상 읽어야 하니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선비다. 이 문화가 깨져버리니 나라가 개판이다. 우리 전통 문화가 세계를 제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가 고홍선 약력>
현) 호남예술원 원장
현) 경상북도 전통 문화 지킴이 소장
현) 비산 날뫼 북춤 자문위원
현) 합천군 덕곡면 반마리 오광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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