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 “박정희 이후 잃어버린 30년 찾아야”

강지혜 / 기사승인 : 2013-06-17 21:05:59
  • -
  • +
  • 인쇄
[인터뷰]역사소설가 황천우가 말하는 ‘인간 박정희’

사진=황천우 작가
[일요주간=강지혜 기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다 군인의 꿈을 품고 일본인 장교가 되기를 결심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이후 광복군, 조선경비대 장교, 남로당 프락치, 육군 소령, 대통령까지 다양한 변신을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경제발전의 초석을 만든 위대한 대통령이자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그는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현재 ‘박정희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에 박정희에 대한 상반되는 평가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갈등까지 일어나고 있다.

최근 서울 중구청장의 ‘박정희 공원’ 건립을 둘러싼 논란도 그러한 예다.

<소년 박정희>의 저자 황천우는 아직까지 철저하게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 입각한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요주간>은 ‘박정희 세대’를 살아온 역사소설가 황천우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와 오해에 대해 들어봤다.


▲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는데.


-그렇다. 좋게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게 바로 이원화, 양극화이다. 우리 사회의 병폐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이제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부터 부정적인 부분 모두 객관적으로 파헤쳐 역사적인 인물로 밝혀야 한다. 미화도 폄하도 안 된다.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가.


-박정희라는 인물이 세대 간 갈등의 요인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출신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저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역사는 철저하게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 입각해 다뤄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참배는 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참배를 하지 않았다. 당시 대선에서 이명박 실정하고 붙었어야 했지만 박정희 대(對) 노무현 싸움으로 몰아갔다. 경기가 어려워 다들 박정희 향수에 젖어있었는데 그러한 선택은 치명적인 실수다. 이정희 후보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다, 다카키 마사오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창씨 개명을 안 한 사람이 어딨는가. 이처럼 시대적 상황을 철저히 무시한 우를 범하고 있다.

▲ 그렇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간략한 평가가 궁금하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생긴다’, 즉 먹고 사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돼야 인간다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맹자 사상을 시작으로 부국강병까지 이뤄낸 정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룬 업적이 있다면.


-앞서 말한 맹자 사상은 조선조 초 정도전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나 실천되지 못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실천했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본격적으로 경제문제에 치중하며 급속하게 그 빛을 발휘했다. 공업화와 중화학공업을 정책적으로 이끌면서 식량의 자급자족과 경제적 자립을 이뤘다. 초가가 기와로 바뀌고 맨땅에 아스팔트가 들어서고 전기가 들어오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한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줬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공표해 교육을 통한 정신의 각성과 쇄신에 주력했다. 1971년 실시된 새마을 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 이뤄 낸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 즉 ‘희망’ 부분이다. 부국강병을 통해 세계 속에 당당한 동참자로서 참여를 제시했다. 자주국방을 통해 외세에 흔들림 없이 대한민국의 홀로서기는 성공하게 됐다.
이처럼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에서의 탈출을 시발로 주인의식의 자각, 부국강병의 초석을 성공적으로 이뤘다.


▲ 반면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의 전형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고도 평가하는데.


-독재 부분은 당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독재라고 평가하는 것은 누구 입에서 나오는 지 생각해보자. 박정희 워너비들, 권력을 잡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얘기다. 독재자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를 들먹이는데 굶어 죽는 사람에게 이념이 왜 필요한가. 그 당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현안은 가난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생긴다’는 사상대로 우선순위 부분에서 달랐던 것이지 그 부분을 독재라고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까지 정치적인 의도로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서민들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독재로 느끼지 않고 지금도 박정희 향수에 젖어있지 않은가. 강자의 탄압을 부각시켜 자신들이 득을 보려고 하는 것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 5.16에 대해서도 쿠데타다, 혁명이다 얘기하며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데.


-나는 5.16을 혁명이라고 본다. 당시 시대상황이 어땠는가하면 5.16혁명이 일어났을 때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며 지지했다. 하지만 혁명이건 쿠데타건 무슨 상관이냐. 그걸로 누가 혜택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 박정희 대통령이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사실이나 친일파라는 논란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


-혈서를 쓰는 것은 그때 당시의 관례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군을 때려잡고 다녔다는 주장도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다. 1930년대 이미 모든 독립군들은 상해로 이동했는데 어떻게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으로 근무하던 1944년에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는 것인가.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친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데 친일파 자체도 인정될 수 없다. ‘친일’은 나의 나라가 존재했을 때 서로 간에 칭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당시 일본에 완전히 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표현하자면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갈 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일제 치하에서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앞잡이’가 있을 뿐이다.
광복군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또 좌익을 했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친일과 좌익이 가능한 것인가. 기회주의자로 봐야 하나.
그러한 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나폴레옹과 이순신을 존경하며 군인을 꿈꿨다.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이 되지 못해 환장한 사람이다. 교사도 그만두고 군인이 됐다. 광복되고 나서 육사에 다시 재입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진=황천우 작가
▲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김대중 대통령을 지독하게 미워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김대중 암살미수사건, 납치 사건 등이 그 예로 자주 등장한다. 먼저 김대중 암살미수 사건은 1971년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김대중이 호남지방 유세를 마치고 서울에서 실시되는 다음 유세를 위해 목포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발생했다. 당시 기상 악화로 목포 공항이 결항되자 광주 공항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던 중 결혼식을 마친 뒤 신혼여행을 가려던 승객을 태우고 광주 공항으로 가던 택시가 김대중 일행을 추월하려 시도했고 순간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택시가 정면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타고 가던 차는 운전사가 급히 핸들을 돌려 차 뒷부분이 스치며 김대중은 경미한 상처만 입은 것으로 끝났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날 박정희 대통령은 위로전화를 했고 의전 비서관을 통해 화분을 보냈다. 육영수 여사도 이희호 여사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해 김대중은 후일 박정희의 따스한 마음에 감격했다고 언론에 소회를 피력한 바 있다.
다음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한 진실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기 며칠 전 김대중 대통령은 신병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간 뒤 유신이 선포되자 현지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해 반 유신 활동을 전개했다. 반체제 활동에 피치를 가하던 1973년에 중앙정보부 주도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당시 윤필용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곤경 탈출을 위해 단독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박정희는 나중에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김대중을 미워한 적도 탄압한 적도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꾀하기 위해 유신체제를 선보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많이들 그렇게 얘기한다. 하지만 그때 당시 상황을 보라. 만약에 유신을 안했다면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갔을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적대적 입장에 있었던 분도 “10월 유신은 박정희 정권 유지 목적이 아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신은 통일을 위한 박정희와 김일성 간의 약속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유신이 있기 전 7.4남북공동성명이 있었다. 북한과 함께 우리끼리 통일하자고 했고 그래서 나오고 구체화 된 게 유신이었다. 독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박정희 도서관 아버지 사진 보는 박근혜 ⓒNewsis

▲박정희를 알면 박근혜 대통령이 보이는가.


-그렇다. 인사 스타일에서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각계 유능한 사람을 뽑고 그 사람들에게 정권을 준다. 그 사람이 어떻든 능력 있는 사람을 뽑고 권력을 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오류를 범한 것은 국가 지도자의 철학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신제가(修身齊家)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도자의 소임을 이어 가야기 때문에 비리와 부정이 있는 사람들은 권력이 가졌을 때 못된 버릇이 튀어나온다. 이러한 덕목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행적 중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유신 후반기에 보인 행적들이다. 긴급조치가 대표적인 예다. 유신 후반기 정도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눈과 귀가 다 막혀버린다. 인해장막에 싸여 버린 것이다. 그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결단들인지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의 죽음 이후 일탈하게 됐다. 여자들을 끼고 술을 마시는 등 향락에 빠져 자신까지 죽음에 이른 부분도 육영수 여사의 죽음 때문이다.
또 일부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이라는 목표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때 우리는 옆을 볼 겨를이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물질적 수평을 이룰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할 몫은 정해졌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잃어버린 30년을 이야기 하고 싶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역사의 수레바퀴가 헛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의 주체의식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경제 역시 어렵다. 앞서 말했듯 박정희 대통령이 못다 이룬 제2의 경제적, 정신적 르네상스를 이제 일궈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보다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미래를 보며 나아가야 한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