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형 “박정희 시절 노예정신 이제는 버려야”

강지혜 / 기사승인 : 2013-06-24 18: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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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치평론가 이동형이 말하는 ‘인간 박정희’

▲ 정치평론가 이동형
[일요주간=강지혜 기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보릿고개 배고픔을 없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빠져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이 5.16군사 쿠데타와 10월 유신에서 보여준 모습은 다른 독재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박정희 세대와 이후 세대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빵이 먼저냐 민주주의가 먼저냐는 논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에 <일요주간>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진행자이자 ‘와주테이의 박쥐들’의 저자인 정치평론가 이동형 씨를 만나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사실과 역사적 평가에 대해 들어보았다.

-우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전체적 평가가 궁금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군사 쿠데타를 동경한 사람이다. 박정희는 중학교 시절에 일본 젊은 육사 장교들이 쿠데타를 했던 내용의 그 쿠데타 백서를 읽고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 나중에 5.16 군사 쿠데타 전에 자신의 5.16 쿠데타 동지라고 할 수 있는 김종필, 석종선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니까 쿠데타는 1961년에 일어났고 한국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으니 10년 전부터 동경하고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전에도 몇 번의 쿠데타를 하려다 실패했다. 끊임없이 쿠데타를 동경했고 권력욕에 싸인 인물이었다. 장기집권도 그러한 것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인에 대한 동경도 크지 않았는가.
▲그렇다. 군인에 대한 동경심이 왜 생겼냐하면 박정희가 어린 시절 살던 곳에 당시 일본 군부대가 훈련 왔다. 박정희는 어린 나이에 일본군 장교가 말 타고 칼 휘두르는 장면을 보고 대단한 동경심을 느꼈다. 이 얘기는 박정희가 직접 쓴 박정희 일기에 나온다. 나폴레옹도 동경했다.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고자 했던 꿈이 큰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사범학교 가면서 교사가 됐다. 사범학교에서는 거의 꼴찌로 졸업했지만 군사학교에서는 대단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전교 2등 정도 했다. 일본 육사에서도 대단히 좋은 성적을 거뒀다. 같은 공부인데도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에서는 하위권이었고 군인을 양성하는 학교에서는 선두권이었으니 군인이 맞는 거다.


-군인이 정치까지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군인이 정치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다. 군인은 말 그대로 군대에서 복무하는 사람이다. 군인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박정희 때부터 시작됐다.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서도 개입해서도 안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군부대를 동원해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을 때 이종찬 장군 같은 사람은 안 된다고 했다. 원래 군인은 그래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 때부터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그런 거를 다들 보고 배웠다. 신군부라고 하는 전두환의 12.12 군사 쿠데타가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를 하나도 차이점 없이 그대로 따라하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의 통치를 보고 배웠다고 할 수밖에 없다. 노태우까지도 그대로 이어져왔다.


-박 대통령을 독재자의 전형이라고도 부르는 데 어떻게 생각하나.
▲별명이 스네이크 박 아니냐. 대단히 냉혈한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통치술은 ‘디바이드 앤드 룰(Devide and Rule)’이다. 전형적인 분할통치 방식인데 2인자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 명의 3인자, 4인자를 둬서 그 사람들이 나에게 충성경쟁을 벌이도록 하는 것이다. 2인자는 원래 어느 정권에서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 혼자 해먹겠다는 것이다. 박정희 최측근, 2인자는 끊임없이 수난을 당했다. 4인 체제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10.2 항명 파동으로 남산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박정희의 친인척임에도 불구하고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 기간 가택 수사만 8~10번 정도 당할 정도로 견제를 많이 받았다. 이후락도 마찬가지고 2인자가 많은 견제를 받았다. 때문에 박정희 권력욕의 화신이었다는 말이 맞는 말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독재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뇌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무려 18년간 통치했다. 횟수로 19년이다. 19년 동안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아니고 임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박정희 이외 대통령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라온 사람들이다. 북한을 생각해보자. 김일성, 김정일 통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은 세뇌를 당한 거다. 그거랑 똑같다고 보면 된다. 지금 나이 많으신 분들이 살아보니 박정희 시대, 그때가 좋았다, 이런 거는 뭐냐면 자신의 향수다. 지금의 50, 60, 70대 이 분들의 전성기는 당시 20, 30대인 박정희 정권 때다. 당연히 그 때가 그리울 수밖에 없다.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인생 최고의 전성기 아닌가. 그런 게 교묘하게 결합돼서 사람들이 환각작용을 보이는 것이다.


▲ 박정희와 박근혜 ⓒNewsis
-박정희의 통치술을 가까이서 지켜본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은 앞에서 말한 아버지 박정희의 통치술 ‘디바이스 앤 룰’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2인자가 없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도 “친박에는 좌정이 없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했다. 지금 보면 2인자가 없다. 회전문 인사, 즉 쓰던 사람 또 쓰고 이런 것들도 아버지가 하던 것과 똑같다. 박근혜 대통령을 수첩공주라고 말하는데 염라대왕의 수첩이라는 뜻을 가진 엔마초(閻羅帳)를 가지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박정희의 용인술, 통치술을 박근혜 대통령이 그대로 똑같이 하고 있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가난에서 구제해준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통계자료를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경제 성장률을 보면 당시 비슷한 동아시아권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중국과 차이점이 없다. 박정희 정권에서 보릿고개를 면했다고 하면 그 나라들보다 경제 성장률이 좋아야 정상이지만 별반 차이가 없다. 그게 뭐냐면 그 시대 60,70년대는 누가 정권을 잡아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당시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싼 인건비를 바탕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공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치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정권에서 하던 것을 그대로 받아서 한 것 아니냐. 박정희가 개발한 것도 아니다. 장면 정권이 1년 밖에 못했지 않았느냐. 그냥 놔뒀으면 솔직히 장면 정권이 박정희 정권만큼 할 수 있었을 거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민주주의가 없는 경제발전이 이뤄진 것이다. 박정희의 독재라는 기틀 위에 경제성장을 쌓았기 때문에 그게 문제점이고 그런 것들이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90년대 IMF라던가 김영삼 정권 때 부실공사로 여기저기 다 무너졌던 것도 개발독재의 나쁜 점이 그대로 나타난 사례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룬 업적이 있다면
▲딱 두 가지 있다. 지금 우리나라 산에 심은 나무의 80%가 박정희 정권 때 심어진 것이다. 산림녹화는 정말 잘했다. 군사정부가 아니면 못하는 거다. 군사정부는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떤 사안을 진행하고자 하면 반대의견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당시 새마을 운동도 성공한 거다. “다 나를 따르라” 이렇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인 의료보험 체계는 박수 받아 마땅하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체계를 부러워한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를 비교하면 정말 우리나라는 대단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면.
▲민주주의를 말살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다 무너뜨리고 거기다가 자신의 경제개발을 했으니 가장 큰 문제다. 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북한 김일성,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라던가 전 세계 독재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 이승만도 그랬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이승만 대통령을 뭐라고 욕했냐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정말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했다.


-5.16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쿠데타다, 혁명이다라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 잘못된 거다. 5.16이 쿠데타라는 것은 법리적, 역사적으로 판명이 난거다. 이것을 가지고 아직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 된 거다. 지금 박근혜 정부의 고위 관료, 공직자들이 청문회에서 5.16에 대해 쿠데타인지 혁명인지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것은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도 속으로 혁명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겉으로는 쿠데타라고 말하지 않는가. 정부가 잘못하면 선거로 심판하면 되지 탱크를 끌고 나온 것 아니냐. 당연히 쿠데타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당시 장준하 선생이 5.16 지지하기 하기도 했는데.
▲장준하 선생은 장면 정부가 제대로 못하니깐 지지한 것이지 장준하 선생이 지지했다고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친일파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혈서를 쓰거나 창씨개명을 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우리가 친일파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옆집의 철수엄마, 영희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일부 평범한 사람이 친일하는 것은 먹고 사려고 하는 것으로 보고 이해한다. 그런데 사회 지도층은 그러면 안 된다. 똑같은 말이라도 옆집 철수 아버지랑 국무총리랑 똑같을 수 없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이 더욱 강조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당시에 군대에서 장교라면 사회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앞장서서 혈서를 쓰고 일본 군대에 들어간 것 아니냐. 일본군 육사로 들어갔다는 것은 친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거다. 나중에 증언도 나오지 않았는가. 일본어를 많이 썼다거나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 일본식 사고를 한다거나 여성관 등에서도 친일파라는 논쟁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파 경력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봐야 한다. 일제가 득세할 때는 일본군이 되서 친일활동을 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싸웠으니까 말이다. 그 다음에 일본이 패망하고 좌익이 득세하니 좌파로 갔다. 남로당 활동을 하다 남로당 좌익 세력이 약화되고 우파들이 정권을 잡으니 자기 동료들을 배신하고 우파로 또 붙었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다. 이런 인물을 존경한다고 하면 대한민국의 정의가 제대로 서지 않은 거다. 우리 아이들에게 뭘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박정희-김대중 관계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철저한 라이벌이었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 김대중이라는 소장파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계속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박정희를 비판하니 박정희 측에서는 대단히 신경이 쓰였다.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콕 집어 “김대중을 무조건 떨어뜨려라”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서 당시 김대중 지역구인 목포에 엄청난 혜택을 줬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때 직접 국무회의를 목포에 가서 2번이나 했다.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목포에 대학과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에 라이벌이기보다는 신경이 쓰여서 떨어뜨리려 했지만 못 떨어뜨리고 71년에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가 돼 선거를 치르면서 라이벌이 된 거다. 그리고 71년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10%인 600억 원을 썼다. 당시 우리나라 예산이 6000억 원이 안됐다. 그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도 김대중과 100만 표 차이가 안 났다. 부정선거도 많이 했는데 말이다. 이에 대해 대단한 충격을 받고 그 다음 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했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는 없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라이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0월 유신에 대한 견해는.
▲미국 CIA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얘기해보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할 때 안보문제를 내세웠다. 안보가 위험하기 때문에 유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신 바로 직전인 며칠 전 4번이나 북한에게 우리가 유신을 할 테니 대비하고 있으라고 얘기했다. 결국 안보 때문에 유신을 했다는 거짓말이 되는 거다. 왜 4번이나 알려줬겠는가. 또 7.4남북공동성명은 박정희가 10월 유신에서 독재를 하기 위해 국민에게 사기를 친 거다. 7.4남북공동성명을 한지 석 달 뒤인 10월 달에 10월 유신을 해서 박정희는 독재 기반을 확실히 했고 북한도 같은 달 사회주의 헌법체제를 만들고 국가주석 체제를 만들어 김일성 독재체제를 확고히 했다. 통일의 기반을 갖췄다고 분위기를 띄운 다음에 이것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독재를 구축하기 위해 7.4남북공동성명을 이용한 거다. 유신에 대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유신 독재라고 한다. 일본 메이지 유신을 본 따서 10월 유신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뼛속까지 일본인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것이다.


-박정희-일본과의 검은 커넥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내용이 궁금하다.
▲이것도 미국 청문회에서 관련 내용이 나왔다. 미국 기밀문서에서 나온 건데 61년부터 65년까지 4년 동안 우리나라가 일본 기업으로부터 6,600만 달러를 정치자금으로 받았다. 우리나라의 당시 여당인 공화당이 일본 기업의 돈을 받아서 정치를 한 것이다. 이 6,600만 달러는 공화당 정치 자금의 2/3에 해당하는 돈이다. 일본 기업이 왜 많은 돈을 우리나라에게 줬을까. 뭔가 이득이 있어서 줬을 것 아닌가. 이게 바로 일본과의 커넥션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겠다. 74년 8월 우리나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다. 열차는 일본 미쓰비시와 히다치에서 사왔다. 이들 기업은 자국에서 판 열차보다 2배 비싸게 우리나라에 팔았다. 비싸게 팔았으니 이득이 많이 나는 거 아닌가. 그 남은 이득을 우리 정부에게 커미션으로 돌려주는 거다. 이게 일본 국회까지 결국 시끄럽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의 기자가 추적해서 미국에 있는 외환은행 계좌에서 일본 기업이 공화당의 김성곤 재정위원장의 계좌로 250만 달러를 송금했다는 기록을 밝혀냈다. 그 중 130만 달러는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니까 우리는 120만 달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 세금으로 비싸게 산 열차가 알고 보니 일본과 한국 정치인이 짝짜꿍해서 반씩 나눠먹은 것이다. 6600만 달러가 얼마나 큰돈이냐면 우리가 한일협정을 체결해 일제에게 36년간 핍박받은 그 세월동안의 대가로 3억 달러를 받았다. 그런데 4년 동안 공화당은 6600만 달러를 받았으니 엄청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뿐 만이 아니다. 삼성이 사카린 공장을 세웠을 때도 일본 기업이 지어줬는데 역시 비싸게 지었다. 미국 기업과의 커넥션도 있다. 미국의 가장 큰 석유 회사 걸프는 우리나라 대한석유공사와 합작회사를 세웠다. 나중에는 그 합작회사의 지분 50%를 가져가는 대가로 우리 정부에게 400만 달러의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 역시 김성곤 씨를 통해서다. 이것도 미국 청문회, 의회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당시 걸프사 회장은 “내가 직접 공화당에 줬다”고 말했다. 그냥 돈을 받았겠는가. 걸프사는 나중에 유공하고 손을 잡고 독점적 사업을 펼친다. 우리나라 기름은 걸프가 다 만진 거다. 4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몇 백 배가 되는 돈을 미국이 갖고 간 거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자금을 쓰려고 이렇게 우리나라의 세금을 가져다 여기저기에 썼다. 일본과 미국한테 돈 받아 선거에 쓰고 정치인들에게는 검은 자금을 뿌리고 그랬다는 것이다.


-재벌문제도 박정희와 관련 있나.
▲지금의 재벌문제는 다 박정희 때 만들어진 거다. 재벌이라는 단어가 미국 백과사전에 나온다. 영어로 그룹이 아니라 한글말로 chaebol(재벌)이다. 한국만 갖고 있는 특이한 단어다. 박정희는 재벌을 엄청 키웠다. 특혜란 특혜는 다 줬다. 지금의 재벌이 박정희 때 많이 생겼다. 재벌들은 번성하고 커지는 만큼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일탈하게 됐다고 하는데.
▲여자문제가 심해지고 남의 말을 안 듣는 것은 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에 심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전에는 육영수 여사를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했다. 밖에서 공화당 문제점을 박정희에게 직접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육영수 여사였다. 나머지는 박정희 꼭두각시였다. 그런 유일했던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다들 시키는 대로 하고 독재가 심해지고 인해장막에 가려진 것도 육영수 사망 이후 심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기 있다면.
▲지금 아직도 박정희의 망령이 살아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선거를 보면 50대 이상 박근혜 대한 투표율이 압도적이다. 90% 정도가 50대가 투표했다고 하는 데 그 중에서 엄청난 숫자가 박근혜를 찍었을 거 아닌가. 그럼 또 그 중에서 상당수가 박정희의 향수로 찍은 거다. 그냥 박근혜가 좋아서 찍은 게 아니다. 그런 결과를 봤을 때 박정희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박정희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지금 박정희를 제대로 모르는 대학생들은 설문조사에서 존경하는 대통령 1위로 박정희 대통령을 꼽는다. 박정희가 한 일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박정희가 먹고 살게 해줬다는 얘기를 부모님께 들은 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알아보고 공부하지 않고 평가한다. 그래서 지금도 박정희 도서관, 기념관이 막 세워지는 게 아닌가. 독재를 했던 것이 맞는데 말이다. 지금 세계 어디에서도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고 동상을 세우는 나라는 없다.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과 평가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얘기가 있다면.
▲박정희 대통령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같은 사료나 팩트를 갖고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가들이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료나 팩트를 왜곡하면 안 된다. 지금 박정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사료와 팩트 자체를 왜곡해 박정희를 추종하고 있다. 대단히 큰 문제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잘못된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5.16 군사 쿠데타는 명백한 팩트다. 쿠데타에 대해 잘했다, 이렇게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지만 쿠데타 자체를 부정하고 혁명이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잘못된 것이다. 또 민주주의가 먼저냐 먹고사는 게 먼저냐는 것은 경제학자들마다 주장이 다 다르다. 또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먹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정말 노예정신이다. 그게 아니라 우리 엄마, 아빠, 형, 누나가 당시 월급 5만원, 10만원 받아가면서 24시간 중 18시간씩 일했다. 그 사람들, 산업의 역군들이 경제를 발전시킨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는 지 안타깝다. 그러한 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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