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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프리다 칼로>의 보컬 김 현ⓒ이희원 |
[일요주간=이희원 기자] 공중파 방송에서 인디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최근 인디밴드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인디’라는 담장 안에서 그룹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온 밴드들은 손에 꼽는다. 여기에 당당하게 인디밴드 1세대로 거론되는 한 밴드가 있다. 수많은 밴드들의 해체 속에 기적과 같은 20년, 밴드의 길을 걸어온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모던 록(Modern Rock)의 열풍 속에서 블루지(Bluesy)한 하드록(Hard Rock)과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한 선율로 다소 클럽 씬의 주류에서 벗어난 음악을 고수해왔다. 멕시코 출신 초현실주의 작가인 프리다 칼로에서 이름을 따온 이들은 업계에서는 지명도 높은 실력 있는 밴드로 손꼽힌다. 여름의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한 지난 주말, <일요주간>은 그룹 <프리다 칼로>의 보컬 김 현(48)을 만났다.
“음악은 나의 현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현 세대 인디밴드 “지금 현재를 즐겨라,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나의 이 마지막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기를”
김 현. 밴드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보컬이자 시인을 꿈꾸는 그는 연극으로 예술을 시작했고, 글 쓰는 걸 좋아했던 그는 ‘음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밴드가 지향해온 음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독하리만큼 고집스러운 블루지한 하드록 혹은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했던 것이 <프리다 칼로>의 역사”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계산이 빠른 음악가들이라면 최신 유행하는 음악이 아닌 마니아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음악을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모던 록에 익숙한 대중은 그들의 음악은 매니악(maniac)하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
그가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간단했다. 1983년 스쿨밴드인 ‘FM’의 멤버로 자연스럽게 밴드음악에 빠진 그는 당시 자신은 음악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음악보다는 삶을, 내 삶의 모든 것이 음악일 수 있기를 바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뜻을 같이 했던 초창기 멤버들과 그룹을 결성한 것이 1995년. 현재 초창기 멤버로는 보컬인 자신밖에 남은 사람이 없지만 음악적인 틀은 <프리다 칼로>가 추구해온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3장의 정규앨범, 그리고 컴필레이션 음반과 싱글. 영화 OST 참여 등 꾸준한 음악활동을 해온 그는 몇 번의 멤버 교체 그리고 ‘아름다운 밴드 연합’의 의장직을 맡으며 힘없이 사라지는 인디 혹은 언더그라운드 계를 지켜온 든든한 맏형 역할을 자처해왔다.
그런 그가 이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다”면서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변화’란 무엇일까.
초기 <프리다 칼로>는 앨범에는 블루지한 느낌이 짙게 풍기는 하드 록을, 또한 클럽 공연에선 외국 곡의 리메이크를 해오면서 최근 프로그레시브한 하드 록도 앨범의 주축으로 삼았다. 그가 말한 ‘변화’란, 얼핏 보면 고루할 수 있는 밴드의 색깔을 바꾸고 싶다는 데서 출발한 것.
그는 “(밴드가 갖고 있는)톤이나 느낌은 그대로 가되, 이전의 구도에서 변화를 주고자 한다. 새로운 현대적인 시류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멤버의 변화가 있었지만 ‘음악’이라는 틀 안에서 함께 해왔던 친구들이기에 밴드가 갖고 있는 음악 자체가 바뀌지 않았다. 즉, 팀의 컬러를 좌지우지하는 퀄리티는 그대로 가지고 가되 대중이 원하는 바를 조금은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변화’에 임하는 그의 자세다.
“밴드가 자신만을 만족시키는 음악을 고집할 때 대중과 멀어진다”는 그는 지금껏 <프리다 칼로> 역시 “제대로 된 록을 하겠다”는 포부만 앞세워 대중이 아닌 소수의 마니아들을 위한 음악을 해왔다며 “이제 변화하고 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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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프리다 칼로> |
밴드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밴드 이름을 지은 계기는 그를 혹은 밴드를 처음 접한 이들로 부터 많이 들어봤을 터. 그는 <프리다 칼로>가 밴드 이름이 된 것은 “당시 여권 신장이 급부상하면서 함께 주목 받았던 게 바로 멕시코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1995년 당시를 회상했다. 국내 역시 양귀자 작가의 책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서며 출판계는 페미니즘(feminism)열풍이 불었다. 당시, 여권 신장의 시류와 함께 집중적으로 조명된 작가가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였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혁명 당시 초현실주의 화풍을 개척한 대표적인 여류화가다.
우연히 신문의 문화면 한 편에 실린 프리다 칼로 자서전에 대한 리뷰를 봤고 책의 한 구절이 그를 사로잡았다. “나의 이 마지막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기를”
그가 반한 것은 화풍이 아닌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인생이었다. 자서전의 한 구절이 지금까지 그가 생각해온 인생관과 일치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좋아서 시작한 밴드이기에 당시 멤버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두 동의하면서 밴드 <프리다 칼로>의 20년 사의 서막이 열렸다.
시인 문태준과의 만남, 그리고 노자(老子)
그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밴드음악과 바로 시를 쓰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직접적이지 않다. 시를 설명하는 대신 자신의 일상을 비유함으로써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그는 시와 음악에서 이런 공통점을 찾았다.
“초창기 음악을 시작했을 때 제니스 조플린(1943~1970 Janis Joplin), 도어즈(Doors)의 음악에 심취했다. 처음엔 읊조리는 듯 노래하는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성에 반했지만 마치 시의 한 구절을 말하는 가사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
어렸을 때부터 시(時)나 문학에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음악을 하면서 종이 위에 나만의 생각을 시로 옮기는 것에서 그만의 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저 끄적거리는 시 쓰는 작업을 체계적 길로 이끌어준 멘토로 그는 시인 문태준을 꼽았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불교방송 PD인 문태준(43)시인과의 만남으로 “이제 시를 쓴다는 게 무엇인 지를 깨달았다”는 후문.
종이 안에 갇힌 두서없는 시가 아닌 한 편의 제대로 된 시를 쓰겠다는 각오로 그는 또 하나의 목표인 신춘문예 당선을 위한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최근 ‘무위의 삶’을 강조하는 노자의 철학에 빠졌다. 노자(老子)의 수양론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의 가르침은 무위(無爲)의 삶을 강조한다.
즉, “노자에서 마음 비움,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단순히 마음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닌 상대적인 분별을 초월한 마음 상태를 말한다”는 게 그의 설명. 이것이 바로 그가 최근 노자 열풍에 빠진 이유다.
그는 이런 노자의 철학을 밴드의 음악,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시비선악과 미추(美醜), 모든 상대적인 것을 포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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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프리다 칼로> |
나를 힐링 하는 음악...그리고 시
“시와 음악이 삶의 전부”라는 그에게 진정으로 힐링이 되는 가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록밴드가 합주를 하다보면 어느 한 순간, 합(合)이 맞는 다는 마음이 들 때가 생긴다. 그것은 비단 음악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를 찾는 순간, 본질에 대한 느낌을 얻을 때 그 순간 “이것들이 나를 힐링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그는 밴드 <프리다 칼로>의 지겹도록 고집스러운 음악을 하던 과거와 변화를 시도하려는 현재를 연결하는 끈이 바로 시를 쓰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노자가 얘기한 ‘무위의 삶’을 포용함으로써 나를 누르고 있던 묵직한 무언가가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나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 선물로 다가 온 것이 바로 음악, 그리고 시이다.
언더그라운드와 인디 1세대
20년에 가까운 밴드 역사를 되돌아보면 꾸준히 언급된 바로 ‘인디 1세대’라는 말. 그는 “인디 1세대라는 말은 조금은 불편하다. <프리다 칼로>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된 밴드이다. 국내에서 정의하는 인디와 언더는 약간 뒤틀려있다”면서 그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가장 처음 인디를 정의하는 첫 번째는 바로 “상업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아마추어 예술 음악인”을 뜻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영어 independent(독립적인)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상업적인 대중예술과는 달리 비주류의 예술과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며 타 자본을 빌리지 아니하고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소규모 자본만을 이용해 창작하는 예술가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직장인 밴드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인디란 언더그라운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프리다 칼로>는 인디가 아닌 언더그라운드로 시작했지만 이제 구분 짓는 것이 모호해졌다. 부자연스럽지만 ‘인디 1세대’라고 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는 “인디가 상업주의에 맞서 자산의 음악을 만들어 성공하면서 록 음악계의 메인 스트림에 자양분을 대는 것으로 그 성공을 맞이했다면 국내에선 그 의미가 변질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중적으로 뜬 밴드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곧 성공으로 이어졌기에 해외에서 의미하는 ‘인디’와 국내에서 의미하는 ‘인디’사이에 큰 갭이 생겼다는 것. 그렇지만 자생적으로 성장하기에 국내 현실은 너무도 척박했고 기획자들은 ‘인디’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공중파 방송에서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 참여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인디1세대를 이끌어온 밴드로써 나의 아집이 과연 밴드를 위해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출연을 결정한 당시 기타를 치는 친구가 탈퇴를 결정한 시점이기에 “음악적으로 후회가 많이 남았지만 출연 자체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방송을 보고 실망한 팬들이 있다면 이해를 구하고 싶다. 단 한 명의 관객이 우리 밴드의 음악을 들어줘도 좋다는 말보다는 이제 밴드 음악을 찾는 관객이 보다 많아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라는 게 그 이유다.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겠다는 보컬 김 현, 그리고 밴드 <프리다 칼로>는 진정한 언더그라운드의 의미가 개념조차 모호해지는 시점에서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인디1세대를 이끄는 진정한 파수꾼이 아닐까.
인터뷰 말미에 인디밴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현재를 즐겨라, 후회가 남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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