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평화공원 및 장진호전투 추모관 양수근 위원장

6.25평화공원 및 장진호전투 추모관 김영석 위원장
[일요주간= 김슬기 기자] 6.25가 발발한지 어언 65년이 흘렀다. 길다고 하면 길지 모를 시간 속 결코 잊을 수 없는 건 동족상잔간의 비극 그리고 직간접 참전국 70여국 속 수백만 명 사상자에 있다. 당시 우리나라를 도운 16개국의 참전국과 의료, 물품을 지원한 40개국, 그리고 북한을 도운 10여 개국 등 총 70여 개국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한 6.25에는 최종 사망자 수가 정확히 집계되고 있지 않고 있으나 대략 수백만 명에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만큼 치열한 전투로 지금도 미국 등 당시 참전국 역사 속에서도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6.25가 유독 오늘날 우리 가슴 속에선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안타깝고 유감스런 상황에 6.25 역사를 다시 기리고자, 전쟁 속 몸 바친 영웅들을 추모코자 6.25 평화공원 및 장진호전투 추모관 건립위원회가 발족됐다. 영화 ‘국제시장’의 소재이기도 했던 장진호 전투는 6.25 여러 전투 중 하나며, 1대 10이라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12만 명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연합군 병력 10만 5000여 명, 피난민 9만 8000여 명 등을 무사히 탈출시켜 성공적인 후퇴작전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이런 장진호전투를 널리 알림으로써 6.25 전쟁을 다시금 새기고, 평화의 소중함을 전파코자 힘쓰고 있는 6.25 평화공원 및 장진호전투 추모관 건립위원회 김영석·양수근 위원장과의 만남은 6.25를 앞 둔 시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 의외로 장진호 전투에 생소한 사람들이 많다. 장진호 전투에 대해 설명해 달라.
▲ (양) 1950년 11월 25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미 해병 제1사단과 중공군이 벌인 전투다. 흔히 장진호 하면 사람이름 인 줄 아는데, 지명이다. 미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라는 곳에서 당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그 근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던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다 성공한 후퇴작전이다.
- 사건 당시, 미국 뉴스위크지에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한 바 있는데. 그럼 왜 하필 장진호전투인가.
▲ (김) 그 이유를 대려면 먼저 치열하고 급박했던 당시 상황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1950년 11월 27일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미 해병 1사단은 무려 10배가 넘는 중공군에 포위당하게 된다. 그 와중 영하 35도 강추위를 만나 2,800여 명 절반이 동상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처절한 상황이었다.
-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 (김) 당시 전투가 일어난 개마고원 일대는 고도가 무려 1,000m가 넘는 고지대인데다 낮 기온이 영하 20도 밤엔 영하 35도까지 떨어지고 무릎까지 눈이 쌓였다고 한다. 얼마나 열악했냐면, 먹을 건 고사하고 총상 환자들에게 맞힐 모르핀 주사조차 얼어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신문엔 이렇게 표현했다. ‘혹한이 적보다 더 무서운 지옥의 사자’라고. 우리 역사상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 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2대 동계 전투로 손꼽힌다. 미군 전사에는 ‘역사상 가장 힘들고 처절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 그럼 흔히 후퇴작전으로 기억되고 있는 장진호전투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있는가.
▲ (양) 장진호전투는 단순히 미군1개 사단의 철수 작전이 아니다. 당시 미 해병1사단이 무려 10배가 넘는 병력의 적 포위망을 뚫고 철수에 성공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단순히 철수가 아니라 이 작전에 성공하면서 중공군 전체 작전과 6.25전쟁의 국면을 뒤바꿨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만약 미 해병1사단이 포위를 뚫지 못했거나 항공철수를 했다면 당시 함경도 일대에서 철수하는 2개의 국군 사단과 미제10군단 전체가 중공군에 포위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이 철수 성공이 국군과 미제10군단을 위기에서 살려냈다고 말할 수 있다.
(김) 또 중공군 9병단이 장진호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1월 4일 서울을 점령했던 3차 공세에 주력부대로 활동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중공군이 수원일대에서 공세를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설이 있다. 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퓨리처상 수상 여기자 마거릿 하긴스 또한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여기에 스미스 소장은 ‘사방을 포위당해 어딜 가나 적인데 후퇴라니,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중인 거다’고 당차게 대답한 적 있다.
- 결국 10배가 넘는 중공군 앞에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거다.
▲ (양) 이 전투로 인해 입은 피해 규모는 미군보다 중공군이 더 컸다. 제9병단 소속 7개 사단이 거의 궤멸일보 직전이었다고 하니.. 2만5000명의 전사자에 1만2500여명이 부상으로 중공군은 무려 4개월 동안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병력 보충 등 부상병 치료에 매달렸었다. 덕분에 3차 공세에 차질이 생겼고 그 연유로 수원까지 밀린 UN군이 공격 주도권을 회복해 수도를 재탈환하는 단초가 됐다. 우리로서는 결국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장진호전투가 갖는 의미는 거기에 있다.
- 그럼 장진호전투의 추모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 (김) 이런 치열한 전투 속에서 목숨을 내던진 영웅들을 우리는 65년간 잊고 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들(당시 전투 생존자들은 ‘Choshin Few’ 모임을 통해 현재도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을 위해 우리 대한민국이 결코 그 분들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해 대한민국이 지구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나라임을 세계인이 인정하게끔 하고 싶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품격을 드높이는 성업이라 생각한다.
(양) 현재 미국은 장진호전투 기념비가 3개나 있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또 하나 더 세운다는 거다.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스티븐 옴스테드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 등은 기념비 건립을 위해 올 여름 버지니아 주 콴티코 해병대 기지 인근 대지를 매입할 예정이다) 또 이 장진호전투가 영화(혹한의 17일, 2014개봉)와 책 (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전투, 피의 낙동강 얼어붙은 장진호 등)으로도 나와 주목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이러할 진데, 6.25 당시 이 전투로 전화위복이 됐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참 안타깝다.
- 현재 추모관 등의 건립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 (김) 지금 건립위원회에서는 건립 및 부지 등을 위한 자체 조달 금액을 모집 중에 있다. 대략 300억 원의 기금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실 제대로 건립되고 건립 후 운영 과정이 원활하려면 기업체의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 럼 이 6.25 평화공원 및 장진호전투 추모관은 기존 전쟁기념관과는 어떤 차이를 두고 기획 중에 있는 건가.
▲ (양) 기존 전쟁기념관은 볼거리가 부족하다. 전투에 대한 소개 역시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이를 착안으로 6.25 평화공원은 일단 넓은 10만평 부지에 당시 상황 등을 상세히 알리는 장진호전투추모관은 물론이고, 6.25 참전 16개국 및 또 적국이지만 중공군에 관해서도 기록전시와 조형물을 통해 상세히 알릴 수 있는 평화관 또한 건립할 계획이다. 거기다 민족 수난사와 호국 의지를 다지는 호국수련원 등을 설치해 역사교육의 장으로써 많은 청소년들이 찾도록 하게끔 할 예정이며 또 놀 거리, 먹 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민자 시설을 유치해 지역 명소로써 발전시킬 계획에 있다.
- 평화공원의 설립 장소, 거제도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 달라.
▲ (김)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그 감동이 고스란히 전달됐지만. 장진호전투를 통해 중공군 포위를 뚫고 흥남부두에 도착한 미 해병 1사단이 정원 2천여 명에 불과한 ‘매러디스 빅토리아 호’에 우리 피난민 1만 4천여 명과 안착한 곳이 바로 ‘거제도’다. (빅토리아 호는 2004년 ‘가장 많은 구조작전을 한 배’로 기네스에 등재 됐다) 선상에 오르기 위해 그물사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다수며, 배 위 오른 피난민들도 비좁은 선상에서 혹독한 추위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처절하고 고달픈 과정 끝에 도착한 곳이 거제도 장승포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다. 그 와중 김치 1~5라는 다섯 생명(이 중 한 명은 현재도 거제도에서 거주 중이며, 그도 장진호전투 추모관 건립을 바라고 있다고 전해진다)이 태어나기도 했고, 더군다나 무사히 도착한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후에 이 날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부를 정도로 안도와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 날과 함께 한 장소가 바로 이 거제도인 거다. 또한 포로수용서도 있기에 추모관 건립 장소로선 최적이 아닌가 싶다.
- 거제도에 평화공원 및 장진호전투 추모관이 생길시 그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면.
▲ (양) 거제도 가보면 따로 외국 보러 갈 필요성 못 느낄 정도로 경치가 너무 좋다. 세계적 관광지로써 손색이 없다 여기는데 이런 곳에 평화 공원이 건립된다면 이 부분이 좀 더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거제도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 당시 참전국에 대한 보훈을 평화공원을 통해 널리 알린다면 나라 이미지에 도움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기업들의 해외진출에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김) 평화공원에선 단지 미군을 포함 16개국의 우리 협력군만 소개할 계획이 아니다. 당시 처절하게 전투를 벌였던 모든 대상을 범위로, 즉 적군이었던 중공군, 중국에 대한 기록전시와 조형물 역시 보여줄 예정이다. 당시 적군으로 만났던 중국은 현재 같이 상생해야 할 인접 국가 아닌가. 중국 요우커의 방문으로 얻는 수익이 만만치 않은 최근, 요우커가 가는 관광지 정도는 제주도 정도가 꼽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 만약 거제도에 평화공원이 건립된다면 관광 사업으로써도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 (김) 건립 계획을 3년으로 보고 있다. 거제도 10만평의 부지는 이미 기증을 한 상태로 현재는 장진호전투 추모관을 널리 알림으로써 기금 조성에 힘쓰고 있다. 많은 기업들의 관심과 성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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