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학회를 이름 그대로 단순히 한글을 연구하는 단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름이 그럴 뿐, 그 시작은 겨레의 정체성을 지킴으로써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독립을 지키겠다는 민족학회의 성격이 그 본질이라 할 것입니다.
한말에 고종황제께 상소하여 궐내에 국문연구소를 세우고 1896년 서재필을 도와 독립신문을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주시경 선생이 우리말글 연구에 진력하며 한글강습소를 열어오다가 1908년 민족 운동가들과 최현배 등 그 제자들을 모아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이 그 출발이었습니다.
그 후 이름을 ‘배달말글몯음’, ‘한글모’로 부르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 조선어학회, 다시 광복 후 남북분단이 되면서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올해로 창립 107년이 되었는데,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언어학회, 국어학회가 된 것입니다. 출발은 어렵고 눈물겨웠지만 세계문명사의 큰 자랑으로 우뚝 선 것이지요.


단순히 한글이 우리 글자라서 그것만 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한자 몇 백자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자는 것인데,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영어공부는 물론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한자를 일부러 가르친단 말입니까. ‘부모, 선생, 통일’ 하면 다 아는데 그것을 한자로 써서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까?
억지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자는 데는 초중등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침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사람들, 한자급수시험 장사꾼들의 노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대통령을 물론 교육부장관에게 청원서도 내고 면담을 하여 겨우 한자병기 교육 유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세상에서 글자살이가 불구인 일본을 제외하고 두 가지 글자를 섞어 쓰는 나라는 없습니다. 영어의 문화어는 거의 전부가 고대 희랍어나 라틴어에 어원이 있지만 그 어원을 밝혀 적는 것 본 적 있습니까? 소가 웃을 노릇입니다.
한자병기교육 주창론자 애국아닌 장사꾼들 노림수
광화문 한자 현판은 역사 조작 극명한 실례 ‘통한’
● 2010년 7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광화문과 청와대가 보이는 광화문 광장에서 세종대왕 동상 앞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적이 있는데.
▼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한민족의 자존과 세종대왕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한글전용 정책을 시행하면서 새로 지은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써 달았습니다. 옛날에 달았던 문화유산이 될 만한 현판이 있었다면 응당 그것을 살렸을 것인데,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 대통령이 경복궁 정문 현판을 한글로 써 걸은 것은 그 자체가 놀라운 결단이며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40여 년이 지나 광화문을 새로 지으면서 대통령께서 쓰신 현판을 창고에 버리고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한말 수문장 임아무개가 쓴 희미한 필름을 바탕으로 조작한 한자 현판 ‘(門化光)’을 걸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 조작입니다.
한류문화 한글문화가 세계로 넘쳐흐르는 시대에 참으로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사태였습니다. 이것을 그냥 볼 수 없어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삿자리를 깔고 절하며 항의한 것입니다. 역사를, 문화를 전공한다는 사람이 참으로 역사의식이 없는 짓을 한 것을 온 세상에 고발하고자 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한 것입니다.
●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민족 가운데 한국이 유일하게 기적적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심에 한글이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나라 가운데서 유독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흔히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새마을운동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정치지도자의 꿈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바탕에 한글의 힘, 교육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복 후 그 처참한 가난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일제식민통치 아래서 목숨을 바쳐가며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사정하며 한글을 현대화한 조선어학회 선열들의 위대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복과 6.25전쟁을 겪는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어 국어를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고 과학을 가르친 수준 높은 국민들의 깨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국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습니다. 거의 전 국민이 국어를 마음대로 읽고 쓸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인도나 필리핀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이나 중국도 마음대로 국어를 읽을 수 있는 국민은 반도 되지 않습니다. 미국도 15% 정도는 영어로 된 책을 마음대로 읽고 쓸 수 없습니다. 한글의 힘으로 한국 사람만이 모두 우리말 우리글을 읽고 쓸 수 있으니 그 힘이 어떠하겠습니까.
‘한글의 힘, 교육의 힘’ 가난에서 기적적인 선진국
공기의 소중함 모르듯…한글의 고마움을 실감해야
최현배 선생 우리말과 글을 가꾸어온 혁혁한 공로
주시경 선생 받들어 한글학회와 국어학 기틀 세워

▼ 한글의 온 세상의 글자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은 우리 글자이기 때문에 자랑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한자는 낱말의 수만큼 글자를 배워야하기 때문에 평생을 배워도 다 익힐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 2,500자를 배우고 중학교에서 1,000자를 더 배워도 수만 자가 되는 글자를 다 배울 수가 없습니다. 신문이라도 읽으려면 5,000자를 배워야하는데 그것이 어찌 쉬운 일입니까. 간체자를 만들고 몸부림쳐도 단어의 수만큼 글자가 필요하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중국 사람의 마지막 선택은 한자를 버리고 소리글자를 선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영어 알파벳도 소리글자라 하지만 같은 글자가 쓰이는 자리마다 음가가 다르니 발음부호가 없으면 읽을 수가 없습니다. 지하철 5호선에 신길역과 상일역이 있습니다. ‘Singil’을 ‘신길’로 읽는 사람은 필경 ‘Sangil’을 ‘산길’로 읽을 것입니다. 옳은 소리글자가 아닙니다. 숨 쉬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한글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한글은 필경 21세기 세계인의 글자가 될 것입니다.
● 지난해 10월 8일 우리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한글창제 500여년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이 개관되었는데.
▼ ‘한글박물관’이라지만 ‘한글문화관’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서 자기나라 글자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어 알파벳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3,0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 문자로 발전했고, 중세 라틴문자로 발전하여 근세에 와서 영어 알파벳이 되었습니다. 아랍문자, 히브리문자도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진화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체계적으로 창조된 글자는 한글밖에 없습니다. 한글은 분명히 21세기 세계인의 글자가 될 것입니다.
● “우리의 언어생활 중에는 무분별한 외래어, 비속어로 오염된 부분이 있으나 반대보다는 창조적 언어생활과 소통 방식의 다양성을 감안해 적극적인 수용 태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피력하신바 있다.
▼ 세상에서 한글이 가장 우수한 글자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수한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얼굴이, 우리 풍습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은 우리 삶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것이 중요하지만, 지금 세상은 열린 세상이라 우리끼리 살고 있지 않으니 남의 나라말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자존을 버리고 남의 말, 남의 글을 함부로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려면 남의 말을 배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말을 최대한 지키고 가꾸어 쓰는 것은 자신을 지키고 자존하는 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할 것입니다.
● 한류 열풍에 힘입어 중국, 몽골 등 전 세계적으로 한국어 붐이 일고 있는데.
▼ 세상에는 지금 한류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지구의 끝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홍콩, 상하이, 동남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 유럽 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도 중류열풍, 일류열풍은 불지 않는데 한류열풍은 불고 있습니다.
한류열풍이 곧 한글열풍입니다. 한글로 지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글의 힘이요 창조력입니다. 한글이 그만큼 배우기 쉽고 쓰기 쉬워 그것으로 아무나 글을 짓고 노래를 짓고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외국인도 쉽게 한글을 배워 우리 노래를 따라 배우고 쓸 수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아니합니까. 한류문화, 한글문화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21세기는 분명히 한글문화 한류문화시대가 될 것입니다.

▼ 오늘 놀라운 한국의 기적은 한글의 기적임을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의 기적은 결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혹독한 일제식민통치 아래서 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등 민족지사, 한글학자들이 조선말 사용금지령, 창씨개명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 목숨을 걸고 한글을 현대화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광복 70년에 이르도록 조선어학회 선열들의 피나는 투쟁에 대한 기념비 하나 세우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김황식 전 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게 청원하여 세종로 공원에 지난해 ‘조선어학회 한말글수호기념탑’을 세웠는데, 지금 서울시에서 그것을 헐어내고 서울시향 콘서트홀을 짓겠다고 해서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이 모자라도 세종대왕 동상이 모셔져 있고 세종문회화관이 있는 세종로 공원을 헐고 그 자리에 서양음악홀을 짓겠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세종대왕의 원대한 꿈을 실현한 조선어학회선열기념탑과 한글글자마당을 헐어내겠다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겠습니까. 자리는 잠깐이고 역사는 영원한데 부디 박원순 시장께서 역사에 죄를 짓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나는 겨레의 큰 스승 외솔 최현배 선생을 감히 성자라 말합니다. 일찍이 10대에 주시경 선생을 만나 겨레를 살리는 길이 오로지 우리말과 글을 가꾸고 지키는 데 있음을 깨닫고 평생을 오로지 그 한 길에 바쳐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에 명저 ‘우리말본’, ‘한글갈’을 지어 국어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주시경 선생을 받들어 1908년 한글학회를 세우셨고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 맞춤법통일안, 표준어를 사정하는 데 이론적인 기초를 제시하였으며 1952년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세종대왕의 위대한 사적을 선양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바치셨음은 물론, 광복과 함께 교수직을 버리고 스스로 미 군정청 편수과장이 되어 교과서 편찬 주무를 맡아 우리말 다듬기에 심혈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 어른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운동가요 학자인가는 돌아가신 이듬해(1971년) 장춘단공원에 우뚝 선 ‘외솔최현배선생기념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전국의 학자, 언론인, 정치가들이 그렇게 큰 탑을 세운 것을 보면 그 생의 크고 위대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한글학회 유서깊은 발간물을 위시하여 운영의 자율성까지 담담하게 말씀하여 달라.
▼ 한글학회는 우리말글로 독립투쟁을 해온 민족학회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문명사에 자랑스러운 단체입니다. 우리말글을 연구하는 논문집 ‘한글’을 이번 달로 310호를 내었고 한글문화를 전하는 잡지 ‘한글새소식’을 1개월 주기로 간행하고 있는데 이번 12월로 520호를 간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어느 명문 종갓집을 지키는 사람처럼 이런 빛나는 역사를 지닌 한글학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흔히 한글학회가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줄 알고 있으나 전혀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종로 광화문 가까이 있는 한글회관 건물을 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비 1억을 보태어 준 적이 있을 뿐, 오로지 최현배, 이인, 장지영, 이중화, 공병우, 이은상 선생 등의 헌신적인 재정적 지원에 힘입고 있을 뿐입니다. 한글학회는 민족학회로 우리 겨레와 함께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 김종택 프로필
- 경상남도 거창생(78)
- 경북대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 경북대 대학원 문학박사
- 대구교육대 교수
- 경북대 사범대학 교수
- 경북대 사범대학 학장, 대학원장 역임
- 한글학회 회장,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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