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주간=송필경 두목회장] 나는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학교에서 시험 치는 요령을 배운 것 외에는 달리 배운 기억이 없다. 내겐 학교는 단지 시험 치는 장소일 뿐이었다. 치과의사 면허시험을 마친 순간, 나는 앞으로 시험을 치러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든 ‘절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군의관 훈련 마칠 때도 시험이 있었다. 점수에 따라 좋은 임지에 발령 난다고 하니 열심히 준비하는 동료도 있었다. 나는 이름만 쓴 백지를 냈다. 자질구레한 훈련 수칙이니 독도법 따위를 배웠지만 차라리 오지에 갈지언정 시험을 치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절대’ 시험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뒤 거스를 수 없는 시험을 딱 한 번 보게 됐다. 바로 운전면허시험이었다. 필기시험은 상식 수준인데 그마저도 게으름 피우다가 합격점에 겨우 턱걸이 했다.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만 했을 때, 인생에서 ‘절대’란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되겠다는 걸 느꼈다. 어쨌든 그 후로는 진저리치는 시험을 보지 않고 살았다.
내 때는 중학교도 입시가 있어 아마 초등 5학년 때부터 방학 없이 과외수업을 한 것 같다. 고3 때까지 입시 지옥을 헤맸다. 바람직한 인생의 좌표와 서원(誓願)을 세워야 할 청소년 시기에 삶에 피와 살이 될 만한 윤택한 배움에 접하지 못하고 암기 지식만 메마르게 외웠다.
초·중·고에서는 교과서보다 교사들이 선택한 부교재로 학교 수업을 했다. 부교재를 선택하면 선생님들은 부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국사도 대입 과목이었다. 고등학교 국사 부교재는 ‘요령 국사’란 100쪽 쯤 되는 얇은 책이었다. 전국적으로 꽤 인기 있었는데 책의 저자가 우리 국사 담당 선생님이셨다. 조선의 역사란 '태정태세문단세...'이고, 임진왜란은 1592년에, 병자호란은 1632년에 일어났다는 식이었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서 윤리적인 지혜를 배우기 마련인데, 역사마저 입시 점수 따기 위한 암기 지식으로 삼았다. 내가 대구에서 다닌 고등학교는 박정희 정권 이후 권력 핵심 엘리트를 배출한 이른바 TK 본산이라 일컫는 학교였다. 출세지향적인 엘리트들이 늙은이가 된 지금껏 역사의식 없는 망나니짓을 한 것은 역사를 요령껏 점수 따는 수단으로만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유신시절 대학은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툭하면 휴교였다. 그때 우리 치과 학문은 걸음마 수준이어서 공부를 대충해도 슬쩍 넘어갈 수 있었다. 대학 공부 역시 요령껏 시험만 잘 보면 만사형통이었다.
내 대학 시절에는 우리나라 교수들이 쓴 책이 거의 없었고 영어 원서 복사판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책을 사면 짧은 서문(Preface)을 대충 읽었는데 꽤 흥미로웠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왜“란 의문으로 시작하여 ’이렇게‘ 방향을 잡아 ’요렇게‘ 결론을 내렸다는 식으로 서문을 썼는데, 이를 짧은 철학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현대 치의학 대가로 손꼽히는 그로스만(L.I.Grossman;1901-1988) 선생의 책 첫머리 글귀는 “올바른 치료는 올바른 진단에서 비롯한다. (Correct treatment is based upon correct diagnosis.)”였다. 나는 이 글귀를 치과의사로서는 물론 삶에서도 귀중한 금언(金言)으로 삼았다. 치료를 잘하기 위해서는 진단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어지간한 인문학적 내공 없이는 쉽지 않다. 칸트 말씀인 ‘잘못한 결론은 잘못한 전제의 결과’와 같은 맥락이다.
나중에 불교 공부하다가 안 사실이지만 이 글귀의 의미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원인 때문에(緣)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起)는 연기론은 붓다의 핵심 사상이다.
연기론으로 보면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진단이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치료라 할 수 있다. 연기적 사고야말로 의사의 의무요 임무다.
그로스만 선생의 단순한 글귀와 만남은 자연계 학문에서 인문학의 체취를 최초로 느낀 희열이었다.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읽은 책 가운데 소로((H. D. Thoreau;1817-1862)가 쓴 <월든(Walden)>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부제가 ‘숲 속의 생활’인데, 1830년대 하버드 대학을 나온 측량기사 소로가 ‘월든’ 호숫가 숲 속에서 제 손으로 통나무집을 짓고 자급자족 농사일을 하면서 느낀 지혜를 모은 글이다. 당시로 보면 애송이 나라였던 미국에서, 그것도 30살이 안 된 젊은이가 보여준 사고의 폭은 실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철도 부설을 막 시작하던 때에 기계문명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더욱 맑은 자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속삭이는 외침은 인간 지혜의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다 기타’ 그리고 중국의 ‘논어’와 ‘맹자’의 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쓸모없는 노년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질타했다. 비판적인 사유의 깊이는 공자 맹자 말씀만 우주의 전부인양 굳게 믿고 있었던 그 당시 조선의 고리타분한 유생과 어떤 면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미국을 일천한 역사와 천박한 문화를 가진 나라라 흔히 비하해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사람들은 소로를 제대로 안다면 그런 말이 대단히 실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로 전에는 에머슨이 있었고 또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 문명으로 무장한 엘리트들이 줄줄이 도사리고 있었다.
더욱이 소로는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하자 그 유명한 <시민 불복종의 의무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하여 조국의 야만성을 통박했다. 이 책의 첫 구절인 “내 가슴에 다음과 같을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다스리지 않는 정부일수록 좋은 정부이다.”라고 한 것은 후세 정치학도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소로 사상을 고스란히 물러 받은 이가 바로 간디다. 간디의 비폭력을 통한 불복종운동의 뿌리는 소로의 사상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에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물학과를 졸업하려면 4년간 전공서적 외 책 몇 백 권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자연과학도들이 읽어야 할 책은 문학과 예술과 역사에 관한 대작(Masterpiece)들이라고 했다. 아마 이런 인문학 책을 한 달에 서너 권 이상을 소화해야 한다고 들은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미국 치과의사의 인문학적 수준과 측량기사 소로의 놀라운 삶의 예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겪은 교육을 돌이켜보면 지식만 그것도 요령껏 배웠지 지혜를 배우지 못했다. 현재 교육도 내 때보다 별로 나이진 점이 보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암기 지식만 강요하는 게 우리 교육 현실이 아닐까.
내 이런 저런 경험에서 바라 본 바람직한 교육은 지식과 지혜의 조화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지혜의 바탕을 이루고, 지혜는 지식을 슬기롭고 윤리적으로 사용할 때 빛을 발한다는 의미다.
우리 사회의 토론문화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는 동양 사회의 취약점이기도 한 수학적 지식이 삶과 동떨어져있기 때문이라 본다. 문과를 지향하는 학생의 일반적인 취향이 수학을 못해서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데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 인문학에 접근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플라톤이 세운 인류 최초 대학 《아카데메이아》의 입구에는 이런 표어가 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여기에 들어오지 말라.” 기하학은 인간이 물질문명을 일구는 기본 지식이고, 아카데미아의 목적은 삶을 지혜롭게 하기 위한 철학적인 탐구다.
서양 문명이 무지막지한 힘을 갖은 것은 헬레니즘 즉 희랍의 이성적 사유에 토대를 단단히 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아카데미아의 표어가 표상하는 서구 물질문명의 괴력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동양이 황제 내경이니 풍수니 하며 현란한 관념이나 막연한 신비에 빠져 있을 때, 희랍은 ‘삼각형의 두 변은 한 변보다 길다’라는 명명백백한 지식을 먼저 다졌다.
인류의 선각자 플라톤은 수학적 지식과 철학적 지혜의 조화를 교육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는 무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4차 혁명을 부르짖는 첨단 과학 세대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을 소중한 가치다.
근대 이전 교육에서는 우리 사대부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른 도덕 원리만을 공부하려 했지, 현실적 토대인 물적 생산에 필요한 실용 지식 습득에는 아예 소홀했다. 그런데 산업 사회의 현대 교육에서는 윤리와 지혜를 도외시하고 오직 출세와 물질적 부의 획득만을 위한 지식만을 추구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교육과는 완전 딴판이다.
나는 우리 교육을 망친 게 바로 이런 실용적인(이과적인) 지식과 윤리적인(문과적인) 지혜의 분리라 생각한다. 바람직한 인간의 삶에서 지혜와 지식의 이원(二元)이 있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교육 목표는 인재 양성과 학문 고양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두루 통섭하고 종합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교육은 사람을 천박하게 만든다.
예송(禮訟)논쟁 같은 성리학적 당쟁에 몰두하다 나라를 곪아터지게 만든 조선 사대부들이 천박했다.
김기춘, 우병우의 예에서 보듯 머리 좋아 최고 학부 서울 법대를 나와 낙타의 바늘구멍 격인 그 사법시험을 수월하게 합격한 수재들이 윤리를 도외시하고 지혜 없이 처신하다가 당한 말로는 얼마나 천박한가.
백선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백남기 어른의 사망 원인을 진단서에 초보 의사도 납득할 수 없는 엉뚱한 병명으로 기재했고,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그걸 추인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자연과학도가 그 강한 자존심을 팽개치고 왜 천박한 권력에 아부했는지, 혀를 끌끌 찰 정도였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일컫는 김기춘, 우병우, 백선하, 서창석 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엘리트층에서 예외적인 소수의 인물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엘리트들이 현재 기득권의 막강한 주류들이고, 우리 교육 환경이 이런 윤리 수준의 엘리트들을 양산했다고 본다.
나는 고등학교 때 위 네 사람만큼 공부 잘한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엘리트답게 세속적인 성공을 했지만 그에 걸맞은 의무감(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을 지니거나 학문적 성취를 이룬 친구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고담도시 대구 출신답게 정치와 사회를 판단하는 의식은 천박한 수구 세력에 부화뇌동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수준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싱싱해야할 중고교 시절을 입시에 필요한 지식만을 암기로 머리에 꾹꾹 채웠다는 것은 언제 생각해보아도 억울하다. 암기식 교육으로 줄을 세워 서열을 정해 극소수 승자가 사회 지위를 독식하게 하는 교육 풍토가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이런 우리 교육을 확 바뀌어야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현 교육의 진단과, 미래 교육을 위한 처방은 제 나름 의견을 마구 토해내는 장삼이사의 수만큼 다양하다.
“미래 교육을 위한 올바른 처방은 잘못된 교육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데서부터 비롯해야 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제라 나는 생각한다.
나의 연기론으로 보자면 천박한 엘리트들이 득실거리는 것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천박한 엘리트를 배출하지 않으려면 교육 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건 연기의 상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 규범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그동안 숱하게 경험했다.
인간이 그냥 생존하려면 의식주와 건강이 필수이고, 인간답게 생존하려면 교육이 필수다. 그만큼 중요한 교육의 미래를 어떻게 상식적으로 설계할 것인가는 참으로 난제 중 난제다.
과거 시험이 있었던 왕조시대부터 부모들은 자식에게 말문이 트이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천자문을 그저 돌돌 암기하게 했다. 암기식 교육 전통이 지금도 여전하다. 어지간한 부모는 경제적 힘이 닿는 데까지 암기식 대학시험을 위해 고액 과외비에 투자했다. 과외비는 갈수록 가파르게 증가했고, 이젠 소수 부유층만이 그런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런 혜택을 입은 자제들이 이른바 일류 대학을 점령하여 권력과 부의 엘리트층을 독식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학비가 드는 법학전문대학과 의학전문대학 입학과 졸업이 좋은 예이다. 실질적 교육 평등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교육 미래를 위해 새로운 교육 제도를 창조하기 보다는 교육 선진국이 보여준 사례를 따라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유럽의 모범적인 복지 국가들은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낮을 때부터 시작했다.
교육의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교육 정의(正義)>는 유럽 교육 선진국처럼 ‘교육 기회의 평등’은 물론이고 ‘교육 조건의 평등’과 ‘교육 결과의 평등’ 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런 이념들은 교육 선진국에서는 상식이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에 불과하다. 이상적인 해결책은 내 능력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정치·사회·경제·교육계 인사를 망라한 전문가들의 집단 지혜를 요구한다.
나는 ‘교육 기회의 평등’이 우리 미래 교육을 위한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과외 수업 받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고, 대학에서 비로소 전문 지식에 몰두 할 수 있게 한다면, 우리 교육의 고질적 병폐인 암기식 시험으로 대학 학벌 줄 세우기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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