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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
얼마 전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안부 겸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물었다. 그날 모인 친구들 하나 같이 죽을 맛이라며 지금 경기 불황은 정치인들과 가진자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원망했다. 한 친구는 그들이 '공공의 적'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도대체 지도자들이 어떻게 했기에 사회가 이 지경이 되어서 식구들 목구멍 걱정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회는 언젠가부터 지도자와 정치인이 힘을 합쳐 서민 생활을 옥죄며 비틀고 있는 느낌이 있다. 서민은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지만, 그들은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비대해 졌다. 사회가 분위기가 이런 판국에 돈벌이가 되느냐 묻는 내게 "벌이는 무슨 벌이, 입에 풀칠도 못 해 아주 죽을 맛이야"라며 친구들은 술잔을 거푸 마셨다. 그들의 울분은 세상 돌아가는 게 매우 비논리적이라며, 이 비논리가 논리처럼 적용되는 세상 때문에 복장이 터진다고 했다.
우리는 건국 이래 최대의 복합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시장은 기존 체제가 붕괴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며 소비가 줄었고 서민 경제는 엉망으로 국민은 허허벌판에서 알몸으로 비바람을 맞는 상황이다. 장기간의 걸친 경기 불황에 서민 살림은 거덜 나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시장의 논리에 추방당한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서민들은 카드빚에 몰려 빚으로 빚을 갚으며 생애가 신용불량의 적색 신분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태다. 감당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현실성에 삶의 감각을 잃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시대. 사회가 미래에 대한 담론은 얕아 혼란만 가중되는 상황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란 단어는 말 꺼내기조차 어렵다.
많은 혼란과 분열 속에서 탄생한 새 정부가 수렁에 빠진 국민을 구원해 주리라는 기대와 언설이 이 곤고한 시대를 쾅쾅 울리고 있다. 새 정권이 되었건 새 정부가 되었건 또는 정권 주변에 빌붙어서 아직 겻불이나 쪼이면서 어려움을 면하고 있는 정치인이 되었건 근본적으로 불황은 피할 수 없는 똑같은 운명이다. 모두가 위기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회로 복귀를 절실히 기대하고 있다. 얕은 정치적 담론보다 바른 원리는 지도자가 뒤얽힌 관계를 쓰다듬어 가지런히 해주고, 모든 경제 원리를 제자리로 돌려보내 그 고유한 기능을 작동케 함으로써 치유 능력 속에 시장경제는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언설이 힘든 시대를 지배하는 가장 힘 좋은 희망의 과학적인 것으로 보인다.
좋은 삶이란 희망이 없어도 잘사는 모습, 희망이나 전망이 없이도 잘살게 되는 삶이다. 그리고 그게 바라고 사는 삶의 현실이기도 하다. 삶에서 희망을 전제하지도 않고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해 보지만 세상은 희망 없이도 역사가 가능해야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헛된 희망이 인간을 타락시키며 삶은 헛된 희망 때문에 무지몽매해진다. 사람들이 몽매해지는 것은 어설픈 희망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정치의 단골 메뉴인 희망이란 거대 담론을 들먹이며 서민의 삶에 기대심리를 한껏 부풀리지만, 다수 국민은 거대 담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적이 거의 없다. 검증되지 않고 위기 때마다 쓰는 담론은 희망 고문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희망 고문이 일상화된 사회는 기본적으로 거대 담론의, 역사적이란 말들이 잘 와닿지 않는다. 어떤 문제든 이런 방법으로 접근하는 게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 거짓말을 참말 하듯 하는 정치인의 그럴듯한 이설만으로 그것을 믿고 살 수는 있는 만큼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서민 생활에는 거대한 담론보다 눈앞에 닥친 목구멍에 풀칠하는 게 더 급하기에 세상이 어려울수록 단순 명료한 것이 좋다.
아침에 눈 뜨고 대문 밖만 나서면 싸워야 하는 각박한 시대. 먹고살기 급급해 옆 돌아볼 짬이 없는 국민에게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단어를 내밀며 어느 쪽에 서느냐로 사람을 판단하는 풍토가 못마땅하다. 보수적인 생각이 보수적인 삶을 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진보 행동을 하는 게 합당하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이름으로 삶과 사실이 왜곡되는 것으로 진보가 정권을 장악했으니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모든 문제를 집단화 패거리화함으로 개인의 정치적 의견을 묵살하고, 모든 문제를 세력화함으로써 승부를 가리려 한다. 이러한 싸움 방식은 여대(與大)시대의 가장 추악한 야만성이다. 그리고 이 야만성은 민주주의 모든 이념을 독점하며 깃발을 흔들고 있다. 강조하건대 진보, 보수로 편 가름을 일상으로 하는 정치로는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는 것은 불가하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운 양심(良心)에 비춰 타인의 양심은 바르지 못하다는 자의적 해석이 우리 사회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로 깔려있다. 여당에서 추진하는 사법부와 검찰개혁은 권력 집중을 분산한다는 뜻도 있으나 내 편 인사를 통해 통치의 목적에 맞게 순치(馴治)하겠다는 정치적 전술이 더 돋보인다. 입법권과 행정권을 양손에 쥔 현 정권은 통치 독점권을 마음껏 발휘해 포플리즘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빚을 내어 무너진 경제를 다시 일으키자는 정치 방법도 왠지 꺼림직하다. 그것은 후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돈을 빌려 전 국민에 나누어 준다는 방법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나는 이 정책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논리가 개별적 인간의 삶의 구체성 위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고 일괄적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제도 밖으로 추방되어야 하는 시대. 빈익빈 부익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 되었다. 정치인의 부(富)는 오히려 비대해졌고 서민의 고통은 전담되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말하긴데 새 정부의 목표는 민생이 우선이지 정치가 우선 되는 결과로 민생이 외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서민의 희망이 패거리 정치 아래서 벌어지는 또 다른 예속에 눌리는 희망 없는 세상이 아니길 바란다. 정치 돌아가는 것을 살피니 우려할 만한 조짐은 이미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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