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웰 다잉이란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3-10-10 1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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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정년퇴직 후 집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아내가 갑자기 바빠졌다. 어딜 가는지 일주일에 네 번은 출근하듯 아침 시간에 바삐 나간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가 "우리 나이는 삶보다 죽음을 생각해야 하기에 주변에 사람들을 위해 호스피스 교육을 받는다."며 아내를 꼬드긴 것도 원인이지만 장모님 연세가 구십을 넘겼기에 장모님 케어를 위한 것도 요인이다. 아내는 요양보호사 교육기관에 등록하여 동료와 함께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문득 떠오른 '웰 다잉' 죽음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떠나지를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병원에 갈 일이 잦아져 병원에 갖다 준 돈이 수십만 원이 넘는다. 지난해는 갑자기 가슴이 쪼이는 아픔을 느끼며 정신이 혼미해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 증세가 '급성심근경색증'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응급실에서 긴급 처치를 받았다. 중환자실에 옮겨져 긴급으로 시술을 받았고 결과가 좋지 못하다며 중환자실에 며칠을 지냈다. 일반 경우 시술 후 보통 2, 3일 정도 머물다 일반 병실로 옮겨지는 게 통례인데 기약 없이 중환자실에 머무르니 왠지 불안했다. 담당 간호사에게 물으니 계속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 있다며 더 이상 대답을 안 해주었다. 혼자 중환자실에 누워있으니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눌렸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 아직은 두렵다. 삶의 미련이 있어서라기보다 인간 본능이라는 생각 때문이라 자위한다. 죽으면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사랑이나 열정도, 그동안 살아온 모두가 소멸 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리. 죽어서 소멸하는 희로애락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이가 드니 그저 편안한 마음과 건강한 체력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이 조물주가 주신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길 바라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으려 한다.

주변 친구가 불치병으로 남은 여생을 의술에 의탁하는 요양병원에서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가 오래지 않았는데, 치료를 거듭하던 친구가 생을 마감했다는 부고를 받았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은 왜일까. 나는 그 친구가 마지막 이승에서 저승행 의복을 바꿔 입는 입관 의식 절차를 지켜보았다. 잠자듯 아무런 표정 없이 핏기없는 얼굴. 친구는 열반의 강을 어떻게 건너갔을까. 징검다리 건너듯 훌쩍훌쩍 건넜을까. 조심조심 건넜을까. 후회하지 않으려면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을 여민다.

새삼 이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는 게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지만 친구의 죽음은 바로 나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재물, 아끼던 모든 것은 다 놓아둔 체 홀로 이 관 속에 누워있는 모습에서 아, 친구는 무엇을 가지고 저승으로 갔을까? 비로소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저 그 자신의 마음만 가지고 갔을 것이다. 친구는 평소 삶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으며 돈도 제법 모았지만 결국은 다 남기고 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잘 가꾸어 주변 정리도 잘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나도 내일 죽음이 온다면 내가 가져가는 건 무엇일까? 누구나 다 똑같이 차별 없이 나 자신만 가져갈 뿐이리.

흔히 잘살자는 글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글이다. 그러나 못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고 잘 살기가 그리 쉬운 것인가. 요즘 내 나이에는 잘 살자 라는 말보다 잘 죽자는 말이 더 와 닿는다. 죽음을 의술에 의지해 싸움하듯 사는 걸 투병이라 말하며 육신에 병이 들어 삶을 싸우듯 사는 불행한 사람이 주변에 점점 늘어난다. 사람의 생로병사는 생, 노, 병, 사로 따로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포개져서 흘러가는 것이다. 생 속에 死가 있고 老가 있으며 病속에 死가 있다. 그러므로 의술은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을 바르게 인도하는 게 의료업의 본연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생로병사에 거역하는 길이 아니라 생로병사와 함께 흘러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명경지수와 같은 삶, 채우려 욕심내지 않는 마음.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삶에 슬플 때 더 슬퍼하고 기쁠 땐 더 기뻐하련다. 다만 그것에 젖지는 않으려 한다. 분노가 쌓이는 삶이라도 분노에 물들지는 말아야 한다. 삶이 상(想)에 물들지 않는 삶은 고요하다. 고요하니 맑고 맑으니 깨끗하고 상큼하다. 이것이 명경지수의 마음이요. 내가 남은 생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삶이다.

하수들이 바둑을 둘 때 옆에서 지켜보는 고수 눈에는 하수의 생각이 다 보인다고 한다. 돌을 어디 두면 사는지, 죽는지 말이다. 욕심에 찬 하수는 곧 죽을 자리인데도 돌을 놓으며, 대국 상대 생각보다 제 생각에 있다는 게 고수 눈엔 뻔히 보인다. 사람들이 자기 바둑을 둘 때는 수를 놓칠 때가 많다. 반면 옆에서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둘 때는 수가 잘 보인다. 흔히 옆에서 훈수를 둘 때는 2단계 이상 바둑 실력이 더 높아져 보인다고 말을 한다. 왜 그럴까? 훈수 바둑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나'가 없으면 삶에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그런 삶은 인생에서도 고수가 된다. 남의 바둑 훈수 두듯 한 발짝 물러나 나의 바둑을 바라보는 여유, 거기서 나오는 걸러진 생각으로 나의 삶을 바둑 훈수하듯 차분히 풀어가는 삶. 이렇게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삶이 힘들지 않고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이든 그 상(想)에 물들지 않는 삶.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집착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다 가고 싶다. 그것이 웰 다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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