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민주주의를 위한 성찰과 모색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4-04-01 14: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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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민주주의의 꽃인 정치가 증오와 혐오로 괴물화되 버린 한국 사회를 보며 대의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어찌 저런 일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가끔씩 품게 된다. 일본 사학자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 사회는 정치 일색으로 이루어져 정치 하나로 지탱하고 있다며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모든 길은 정치로 통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 모두 정치로 가고, 온 국민이 온통 정치 이야기를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는 지극히 정치적인 인간들의 나라이다. 특히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킨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6월, 민주주의와 주권 회복을 위한 시민 항쟁으로 절대 권위주의의 체제가 무너지며 이 땅에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한 지도 38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개인의 인권과 언론의 자유, 국가 기관의 삼권분리와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 선출의 불합리한 제도 등 모든 면에서 올바로 개선했다. 또 현직 대통령 탄핵까지 국민의 집단적 경험의 폭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야말로 38세 청년으로 성장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도자를 뽑을 수도 있고, 임기 전 탄핵할 수도 있다. 이렇게 잘 성장한 민주주의의 효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고 말 할만하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란 이름이 가치에 맞게 잘 시행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보자. 그동안 우리는 온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정작 그게 무엇이었는지 새롭게 조명해 보이는 데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80년대 민의의 요구에 따라 무혈 쟁취한 민주제도는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흐름에 따라 처음 시작 때와는 달리 점차 퇴색되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통해 본 권력 중심부의 불통에 분노한 익명 시민들은 옹기종기 모여 촛불집회를 통한 불복종이 만든 작은 지류(支流)가 민의의 대하(大河)를 이루었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격류(檄流)처럼 도도히 흐르며 자리매김하는 듯하였다. 촛불로 정권을 잡은 지난 정권은 '시민주권에 의한 존중'과 '사람이 먼저'라는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며 민주주의 정치를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장대한 이미지는 촛농처럼 녹아내렸고 촛불은 꺼졌다. 곳곳에는 기대보다 우려가, 희망보다 좌절이 득실했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 단어가 쓰인 것은 때로는 독재정권의 반대급부로, 때로는 운동권의 투쟁 논리로 때로는 좌우 이념논쟁의 도구로 사용되며 정작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부족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진보의 동의어가 아니듯 어떤 체제나 단체의 포장지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정치권은 여ㆍ야,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를 민주주의의 무늬만 덧씌워 민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지한 정치를 하고 있다. 선거가 의회 패권을 위해 민주적인 방식보다 비민주적인 방식을 적용하는 아이러니를 보며 이러한 작태야말로 비민주적이며 모순에 극치를 우리는 보았다.

흔히 민주주의 강점인 탄핵제도와 청문회 제도 회기중 의원 불체포제도 등 많은 제도들은 민주주의를 좀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지만, 그 좋은 제도를 비민주적 아전인수 사고(思考)가 설치며 도깨비방망이 제도로 변질시켰다. 탄핵은 국정 마비와 협박 도구가 되었다. 청문회는 인격을 깎아내리는 망신 주기로 본래 도입한 뜻과는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다. 불체포 특권은 범죄자 보호 방패로 사용하며 개혁적 입법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흐지부지되었다. 제도는 잘못 없이 좋으나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들의 수준이 제도를 망쳐놓았다.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와 잘못은 기득권층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며 제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책으로만 배워왔던 서구 정치제도를 민주라는 핑계로 특권 주의 군상들과 운동권의 독점적 전유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의회의 절차적 대의제는 입법 독재와 꼼수로 몰락했고 평평해야 할 언론지형은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법치의 근간인 사법부의 독립성도 위태로워졌다. 나라는 분열되고 대화와 소통 대신 혐오와 반목이 더욱 심화 되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 절대 독재 권력으로부터 어렵게 쟁취한 민주혁명이 유사(類似) 파시즘 문턱까지 다가선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질적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질되어 가고 있는가. 좋은 취지의 민주주의의 본질은 간 곳이 없고 기득권층의 도구로 사용되며 파쇼에 가깝게 변질되었는지 나는 한국 민주주의가 갈수록 나빠지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민주주화 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이 학생 운동권 출신과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는 제도보다 사람을 더 믿는다는 신조 때문에 사람 위주의 정치를 하며 제도는 외면되었다. 진보는 이질성의 연대, 다종족의 유대를 본질로 하는데 우리 진보는 동종교배(同種交配)와 동종단합(同種團合)을 일삼았다. 이 점은 보수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정치권 모두 그들끼리의 단합으로 난공불락의 성(城)을 쌓으며 민주와는 점점 멀어지는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 을씨년스러운 정치 행위를 보며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낡은 보수, 운동권 정치를 해고하고 싶다.
올바른 '민주주의를 위한 성찰과 모색' 은 혼돈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 모두가 고민하며 변함없이 지켜야 할 고귀한 정신 영역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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