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태산명동 서일필에 목숨 거는 정치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4-06-28 16: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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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2024년, 총선을 앞둔 여당의 정치적 언어는 온갖 심판론이 선거 구호로 난무했지만, 오히려 여당이 심판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많았던 말들은 선거가 끝나자 들뜬 바람에 날려갔다. 당시 세상을 뒤집으며 시끌벅적했던 언어는 더 이상 진화하지 못했고 가지런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소모성 괴변으로 그 말들은 의미소(意味素)를 상실한 채 허공을 쓸고 지나갔다. 그것은 가히 언어의 지옥이라고 할 만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파 해쳐 설명하면 남는 것이라고는 시대의 기막힌 현실은 확인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는 백치감 뿐이다.

때 이르게 찾아온 더위는 찌는 듯 덥고 세상 돌아가는 형세는 일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들쑤셔 놓은 사건들이 선거가 끝나며 조용히 수렴될 것 같았지만 여기저기 서 불쑥불쑥 솟구치니 백가쟁명처럼 소란스럽다. 다수당으로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채상병 특검, 김건희 여사의 각종 의혹 사건으로 연일 군불을 때니 사건은 꼬리가 꼬리를 물며 확대 재생산되어 한껏 부풀어져 있다. 그동안 많은 이슈를 확대해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르며 갈 길 먼 시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국회 원구성도 다수 야당이 여당과 합의 도출 없이 일방적으로 개문발차하였다. 여ㆍ야당은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다 정작 다뤄야 할 당면 과제는 둿 전이 되었다. 나는 이 혼돈의 상황을 지켜보며 몽유병자와 같은 환각을 느낀다.

정치가 국민의 앎을 기호화된 허상에 복속시키는 것이 아닌지, 대회와 협상보다 쪽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꼬여만 가는 국회 운영을 보며 과연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이고 올바른 방법인가 의구심이 가득하다. 선거 끝난 지가 언젠데 정치는 해묵은 사건으로 갈등하며 끝없이 혼란스럽다. 국민은 혼란이 연속인 세상 속에서도 삶은 영위되고 있는지, 이런 의문들이 우리를 혼돈시킬 때, 그런 의문에 시달리는 나 자신의 존재가 바보인지, 아니면 우롱하는 이 시대의 문제와 그에 따른 문제점을 말하는 전체가 몽유세태 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렵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치가 왜 필요한지 뭐 하는 건지를 모르고 단순하게 살았던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본다.

국회 다수당으로 완장을 찬 야당은 정치의 물꼬를 민생에 두지 않고 탄핵을 주장하며 상대방 죽이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물론 야당이 주장하는 각종 현안에 의혹은 사실과 가치에 대한 큰 흐름으로 연결해 볼 때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특정 사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시대의 긴 흐름을 놓치는 일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급적 바람직한 것은 어떠한 사안에 임할 때 그것이 구성하거나 표현하고 있는 흐름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얻어내는 일이 우선이다. 이러한 판단이 반드시 자신들이 주장하는 명제의 정확성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 볼 수는 있다.

성찰이 부족한 작금의 세태에는 포용의 사고와 포용의 사회가 보이지 않는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라는 정치의 근본이 사라졌다. 진정한 경세(經世)의 정치는 간곳없고 상대방 죽이기 모략만이 난무하다. 정작 정치는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며 '국가는 국민 개개인이 최선의 삶을 실현하는 공동체'라는 당위를 비웃는 정치꾼이 판을 치고 있다. 정치인 모두 국민을 위한다며 서민의 삶을 외치지만 작금의 정치 형태를 보면 상대방 죽이는 증오의 정치로 비화하는 책략으로 물들어 있다. 이러한 정치판엔 도덕과 규범, 서민들을 위한 논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외면적인 발전의 증표와 생활의 깊은 바탕의 느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대변환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변환으로 인한 갈등에 사회적 포용력이 부재한다면 과연 그 사회가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사회로 지향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다. 예전보다 사회 환경이 긍정적이고 보다 나아지는 지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나아졌는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많은 서민이 시대의 업보에 시달리고 힘들어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은 모두가 다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것을 풀어주는 게 정치인데 과연 우리 정치는 어떠한가.

야당 독재, 여당 노예로 굴러가는 국회는 야당의 일방적 운영으로 비난과 고성이 오고 가며 고소 고발 상태로 이어졌다. 완장을 찬 야당의 언행과 행동에는 독선과 아집이 서려 있다. 바른 정치는 새삼 설명치 않아도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안민(安民)과 위민(爲民)에 있다. 위민정치는 민을 두려워하는 경외심 즉 외민(畏民)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야당은 이러한 것은 다 무시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쪽수 권력으로 무엇이든 이기려 하니 여ㆍ야 타협은 언감생심이다. 원구성의 관례도 지난 시절 잘못된 관행이라며 법을 앞세운 막무가내로 외민은커녕 무민(無民)으로 일관하고 있다.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다 야당 단독으로 개문발차한 국회는 봉숭아 학당의 수준을 넘는 코미디다. 모든 언론은 일방적 국회 운영의 책임론을 부각하며 한심하다는 논평으로 정치권을 싸잡아 책임을 묻고 있다. 이 사태를 두고 여ㆍ야당이 서로가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서로 우김질과 싸움박질뿐이다. 누구의 잘못이며 어디가 몸통이고 어디가 꼬리인 줄 세 살 어린아이도 다 아는 뻔한 사실인데 서로 우김질하니 이래서 쳐다보는 국민만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야당 대표가 무혐의라고 우기는 대장동 관련 재판도 확실한 사실은 사건의 실체는 드러났는데, 야당은 실체가 없다고 말해야 옳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특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과거 정치 이슈가 된 모든 것은 막상 헤쳐보면 별다른 것이 없었다. 정치인의 눈에는 없는 것은 확실히 보이고,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할 '잘못된, 책임질 사람'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책임의 소재가 정치적으로 뜨거운 현안이 되는 까닭은 그 책임이 어느 쪽으로 귀착되느냐에 따라 얻거나 잃을 수 있는 정치적 이해득실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가 당당하지 못하니 사사건건 정치적 사건을 확대해 무지몽매한 국민을 몽유병 환자로 만들고 있다. 지금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채상병 죽음과 관련된 진실 밝히기, 김건희 여사와 일족들의 각종 문제와 김정숙 여사의 178벌의 옷, 명품 장신구와 인도 방문을 소재로 연일 군불을 피우니 사방에 연기가 운무(雲霧)처럼 깔리고 있다. 탄핵, 특검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적이 어디 있는지, 우군이 누군지를 두고 또 한바탕 국민을 몽유병 환자로 만들 것이다. 제발 좀 이러지 말라. 지금 국회와 나라를 들쑤시는 '모든 것'의 결론은 '태산명동 서일필' 로 결론이 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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