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입법조사처 "비축·설비·계약·조기경보·국제협력 아우르는 통합 에너지 안보체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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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위기가 원유 가격 상승을 넘어 LNG와 LPG, 나프타 등 에너지·산업원료의 실제 공급 차질로 번지면서 한국의 에너지 안보 전략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입법조사처는 공급국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비축과 대체 수송로, 계약 유연성 등을 갖춰 위기 때 실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공급망 구축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사진=pexels) |
올해 호르무즈 위기가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액화석유가스(LPG), 나프타 등 에너지·산업원료의 물리적 공급 차질로 확산되면서 한국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났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회입법조사처(최정윤 입법조사관, 유재국 과장)는 지난 21일 발간한 ‘호르무즈 위기가 드러낸 한국의 에너지 공급망 한계와 과제’ 보고서에서 이번 위기의 특징을 가격 충격에 그치지 않고 에너지·산업원료 공급망 전반의 물리적 조달 차질로 확산된 ‘복합 공급망 위기’로 진단했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기존의 ‘수입선 다변화’ 중심 에너지 안보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위기 발생 시 실제 공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완충자산’과 ‘전환옵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 호르무즈 위기, 가격 넘어 ‘물리적 조달’ 문제로 확산… 미국은 새로운 공급축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호르무즈 위기는 과거 중동발 에너지 충격과 비교해 충격의 규모뿐 아니라 영향이 전파되는 경로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과거에는 생산시설 파괴에 따른 감산이나 유조선의 해협 통행 차질 등이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양상이 주로 나타났지만, 이번 위기에서는 에너지와 산업원료 공급망 전반에서 물리적인 조달 차질이 발생했다.
전쟁 직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와 석유제품 물동량은 일평균 약 2000만 배럴에서 사실상 미미한 수준으로 급감했다. 카타르 LNG 공급 차질로 한국과 인도 등 아시아 수입국들은 대체 현물 카고(cargo) 확보에 나섰으며, 인도에서는 카타르산 LNG 장기계약 물량 공급 중단으로 산업용 가스 공급과 석유화학 설비 가동이 축소되는 상황도 나타났다.
원유뿐만 아니라 나프타·LNG·LPG·황·헬륨 등 에너지 및 산업원료와 해상물류 전반에서도 차질이 발생하면서 가격·물량·물류 충격이 산업원료 수급으로 연쇄 전파되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특히 보고서는 필요한 에너지와 산업원료를 적기에 확보하지 못하는 ‘물리적 조달 위험’이 전면화된 점을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보고서는 셰일 혁명 이후 미국이 원유와 LNG의 생산국이자 수출국으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일평균 약 1360만 배럴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LNG 수출도 단일 국가 기준 세계 최대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호르무즈 위기에서도 비중동 국가들의 공급량 변화가 나타났다. 이라크의 원유 수출량은 2023~2024년 일평균 340만 배럴에서 올해 3~5월 20만 배럴로 감소했고,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630만 배럴에서 410만 배럴로 줄었다. 반면 러시아는 450만 배럴에서 540만 배럴로, 미국은 400만 배럴에서 490만 배럴로 증가했다.
보고서는 걸프지역의 공급 공백을 러시아와 미국 등 비중동 공급국이 일부 메우면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구조가 점차 다극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미국의 부상을 중동을 대체하는 단일 공급자의 등장으로 보기보다는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에 또 하나의 핵심축이 추가된 ‘공급구조의 다극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에너지 수요는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로 집중되는 비대칭적 재편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 한국, 공급국 다양하지만 ‘실질적 대체 능력’ 제한… 나프타 ‘산업원료 안보’ 차원서 관리해야
보고서가 지적한 한국 에너지 공급망의 핵심 문제는 공급국 숫자 자체보다 도입 구조에 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원유 공급국은 18개국으로 일본의 9개국보다 많았다. 원유 수입 중심성 지표도 한국이 약 0.2로 일본의 약 0.1보다 높았다.
하지만 공급국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위기 대응력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보고서의 설명이다.
도입 원유가 동일한 지정학적 초크포인트를 통과하고 국내 정제설비가 특정 유종에 편중돼 있으며, 나프타·LPG 등의 비축 및 계약 전환 여력이 부족하다면 외부 충격에 대한 취약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의 원유 중동 의존도는 정부의 다변화 정책으로 2015년 82.3%에서 2021년 59.8%까지 낮아졌지만,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최근 3년간 70% 안팎을 유지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69.1%였으며, 중동산 원유의 9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것으로 보고서는 설명했다. 이에 따라 중동 의존과 특정 항로 의존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가 한국 에너지 공급망의 취약성을 높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보고서는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를 주요 취약 분야로 지목했다.
나프타는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 생산에 사용되는 핵심 투입재다. 국내 정유 공정의 나프타 수율은 약 20%에 그쳐 내수 수요의 약 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난해 기준 수입량의 약 77%가 중동산이었다. 전체 수입량의 약 54%는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했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원유 수급 불안에 따른 생산 감소와 직수입 물량의 해상물류 마비라는 이중의 중동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나프타 부족은 플라스틱과 포장재, 자동차, 전자 소재 등 전방 제조업 전반의 원료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단순한 석유제품이 아니라 전략적 산업원료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 ‘인프라·계약·지리적 경직성’ 구조적 락인이 문제… 호르무즈·말라카 등 해상 초크포인트도 변수
보고서는 한국 원유·LNG 공급망이 인프라와 계약, 지리적 요인에서 비롯된 ‘구조적 락인(Lock-in)’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중동산 원유는 지리적 접근성과 오랜 거래 관계, 국내 고도화 설비와의 유질 정합성 등을 이유로 경제적인 선택지였고, 국내 정유업계는 이를 전제로 중동산 고유황·중질 원유를 처리하는 고도화 설비에 투자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설비 최적화는 다른 유종으로의 전환을 어렵게 하는 경로의존성을 만들었다. 미주산 경질·저유황 원유를 확보하더라도 기존 설비와 제품 생산구조가 달라 설비 가동의 경제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NG 역시 액화설비와 전용 운반선, 저장·기화시설이 연결된 물리적 공급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공급국을 다변화하는 것만으로 물리적 대체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계약 측면에서도 원유와 LNG 모두 일정한 제약이 존재한다. 특히 LNG는 10~20년 단위 장기계약 비중이 높고 일부 계약에는 의무인수 조항과 도착지 변경을 제한하는 조항 등이 존재해 물량 조정과 카고 교환의 유연성을 낮출 수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장기계약 자체를 줄이기보다 기초물량은 장기계약으로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재판매권·스와프권·증감량 옵션 등 계약 유연성을 결합하는 포트폴리오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지리적 요인 역시 한국 에너지 공급망의 취약성을 키우는 요소로 분석됐다.
지난해 기준 호르무즈 해협에는 세계 해상 원유·석유제품 교역량의 약 25%, LNG 교역량의 약 19%가 집중돼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East-West 파이프라인과 UAE 푸자이라 파이프라인의 정상 가동 시 합산 우회 수송 능력도 일평균 약 350만~550만 배럴로 호르무즈 통과량의 18~28% 수준에 그친다.
특히 LNG는 카타르와 UAE 수출물량 대부분이 호르무즈를 경유하기 때문에 대체 운송경로가 거의 없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따라서 공급국을 다변화하더라도 수송경로가 동일한 초크포인트로 수렴한다면 위험 분산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에너지 공급망을 평가할 때 단순한 수입처 분산 정도뿐 아니라 초크포인트 경유 여부, 대체 수송로, 계약 유연성, 비축, 설비 적합성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주요국 대응서 나타난 ‘완충자산’ 차이… “수입선 다변화 넘어 전환옵션 확보해야”
보고서는 호르무즈 공급 충격의 영향이 각국의 중동 의존도뿐 아니라 비축과 대체 공급원, 우회 수송로 등 완충자산의 규모와 가용성, 대체 공급망으로의 전환 능력에 따라 달랐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대규모 상업·전략 재고와 국가 주도 공급망 통제, 러시아산을 비롯한 비중동산 물량 확대 등을 통해 공급 충격을 완화한 것으로 평가됐다.
일본은 높은 중동 의존도에도 대규모 비축량과 산유국 공동비축을 통한 우선 구매권, 해외 자원개발 지분 등을 활용해 대응 여력을 확보한 것으로 분석됐다. 인도는 러시아산을 비롯한 비중동 공급선 전환으로 물량 부족을 방어했지만, 비축 여력이 낮아 대체 원유 확보 경쟁 과정에서 가격 프리미엄을 감수해야 했다.
한국은 IEA 공동 방출 2250만 배럴에 동참하고 200일분 이상의 비축유를 가동하면서 단기 방어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나프타 등 산업원료 비축과 석유·천연가스 자주개발 측면에서는 취약성이 나타났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번 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에너지 안보정책을 수입선 다변화에만 한정하지 않고 공급망 회복탄력성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우선 나프타와 같은 전략적 산업원료의 비축 근거를 마련하고 품목별로 차등화된 비축목표를 설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평시 최소비축에서 위기 시 추가비축으로 전환되는 단계적 비축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제설비와 관련해서는 비중동산 원유 처리와 원료 전환능력을 높이는 핵심 기술 및 시설에 제한적으로 우대 공제율을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 조기경보 체계를 강화해 기존 유가와 도입단가뿐 아니라 나프타 스프레드, LNG 현물가, 해상운임지수, 민간재고량, 정유·석유화학 설비 가동률, 수입처 집중도, 선박 및 대체항로 확보 여부 등 실물 공급망 지표를 종합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자원통상 외교 측면에서는 원유와 LNG의 시장 및 계약 특성에 맞는 조달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동아시아 수입국 간 공동 조달과 스와프 협력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아울러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도 석유·천연가스와 나프타 등 산업원료 수요가 지속되는 만큼 핵심광물, 전력망·저장설비, 전략적 산업원료를 하나의 틀에서 관리하는 통합적인 에너지 안보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보고서는 결국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 모든 경직성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용·공급 안정성·위기 대응 유연성 사이의 균형을 조율하면서 위기 상황에서 실제 활용할 수 있는 ‘완충자산’과 ‘전환옵션’을 체계적으로 확보하는 데 있다고 제시했다.
일요주간 / 최종문 기자 joing-m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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