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원의 창업자의 아버지인 故 차형준 목사, 기독교계 독립운동 이끈 인물
[일요주간=이수근 기자] 평양 대부흥 운동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으로,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과 더불어 한국 교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원지에서 7명의 한국인 장로교회 목사가 배출되었는데, 1890년 10월, 언더우드 선교사는 “신학반”(Theological Class)을 설립하여 백홍준, 김관근, 서경조, 최명오,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 등에게 기포드, 헤론과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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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평양신학교 전경. |
1901년 10월, “신학교육위원회”는 수업연한을 5년으로 잠정 결정하였고 1902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를 목사 후보생으로 드디어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시작이었다.
마펫은 신학일반과 소요리문답, 베어드는 구원론과 모세오경, 스왈른은 유대사기와 모세오경, 리는 목회학, 헌트는 마태복음과 고대사, 번하이셀은 산수를 교수하였으며, 이들 선교사는 모두 미국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1904년, 3월과 12월에 6명의 신학생들이 2년 과정을 졸업하였고, 지방 공의회위원회에서 한석진과 서경조 등 19명이 목회자 후보생으로 선정되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에는 평양공의회위원회가 마펫을 임기 2년의 신학교장으로 임명하고 언더우드(북장로교), 전킨(전위렴,남장로교), 엥겔(왕길지,호주장로교빅토리아선교회)을 교수로 임명하였다. 1905년에는 상급반 8명, 하급반 14명이 재학하였고, 1906년에는 1학년 29명, 2학년 14명, 3학년 7명이 재학하였다. 1906년의 교수진은 무어(서울), 스미스(부산), 레이놀즈(남장로교), 전킨(남장로교), 엥겔(호주장로교)이 헌신하였다. 1907년에는 75명의 재학생이 있었고, 1909년에는 5개반 138명으로 급증하였다.
1901년부터 초기 5년간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주도하였으나 1906년 이후 남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 빅토리아선교회와 캐나다선교부가 참여하는 장로교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901년, 초대교장에 취임한 마펫은 1924년까지 24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평양신학교를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교로 정착시켰다.
1907년 6월20일, 평양신학교를 “장로교회신학교”로 지정하고 길선주(40세,평양), 양전백(39세,구성), 서경조(58세,의주), 한석진(41세,의주), 송인서(40세,평양), 방기창(58세,평양), 이기풍(40세,평양) 등 7명의 졸업생이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7년 이후 1916년까지 171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230명이 재학 중에 있었으며, 1916년에는 230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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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회 평양 신학교 전경(1922년). |
평양신학교 졸업생들은 한국 교회 전반에서 그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기풍 목사(1907)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윤명식(1909), 최태진(1912)이 추가로 파송되었다. 길선주(1907)가 평양 장대현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고, 양전백(1907)이 평안북도 선천읍교회를 담임하였다. 한석진(1907)은 총회신문 편집장으로 봉사하고, 김필수(1909)는 총회장으로 헌신하였다. 박태로(1912), 사평순(1913), 김영훈(1913)이 중국 산동지방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최성주(1910), 김덕선(1911), 차형준(1911), 김내범(1913), 최봉석(1913), 한경위(1914)가 만주 한인들을 위한 목회를 담임하였다.
◇ 故 차형준 목사의 독립운동 비사
이들 중 차병원의 창업자 故 차경섭씨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故 차형준 목사의 발자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79년 평북 용천 출생인 차형준 목사는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일본의 강점기 당시 목회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일본 정책에 순응해 친일행위 및 우상숭배 행위를 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형준 목사는 이와는 정반대 되는 길을 걸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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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신학교 4회 졸업생 故차형준 목사. |
신민회, 송죽 결사대, 한영서원의 학생비밀결사 등 기독교인 중심의 독립운동 또한 이를 증명해준다. 차 목사의 측근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목회자라는 착시효과를 이용해 이남, 이북은 물론 중국 등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차형준 목사는 평양신학교 입학 전부터 강계(평안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지역에서 사경회 교사로 활동하며 자성읍 지역에 개척 전도를 하고 누가복음을 가르치는 등 여러 활동을 펼쳤다.
강계는 익히 북한의 ‘강계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계정신이란 북한의 자강도(평안북도의 강계군.자성군.후창군.위원군 등의 지명이름)가 북한이 큰 어려움을 겪던 시절 이를 극복하는데 모범을 보였다고 하여 도청소재지인 강계의 이름을 따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말은 한 때 북한의 경제선동의 대표적 구호로 쓰이기도 했다.
강점기 당시 강계 지역의 3.1운동은 강계읍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됐다고 한다. 이 강계읍교회는 차형준 목사가 평양신학교 입학 전서부터 주로 활동했던 무대다. 3.1운동 당시 강계의 만세시위는 4월 8일에 일어났는데, 계례지병원 지하실에서 찍은 독립선언서 2000부와 함께 강계읍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본 당국은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고, 강계읍교회의 종을 여섯 달 동안 치지 못하게 하는 등 강압에 나섰다. 당시 강계읍교회의 가장 중요인물은 바로 차형준 목사의 6촌 차학연 장로였으며, 차형준 목사는 차학연 장로의 곁에서 묵묵히 활동을 해 나갔다.
활발한 전도 활동을 진행하던 차형준 목사는 신학교 졸업 후 191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덕흥, 정주, 청정 등 네 교회의 목사로 임명됐다. 이 외 중국에서도 전도목사로 활동하던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별신학, 1925년 신학연구 등 좀 더 심층적인 공부를 진행, 1931년 또 한번의 평양신학교 졸업증서를 받았다.
또 이 과정에서도 차형준 목사는 평북로회(평북노회)의 총대로 총회에 참석하곤 했다. 평북노회는 1907년 평양 장대제교회 예배당에서 조직된 독노회로, 국내와 만주, 중국 산동성 지역 등에 선교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다. 차 목사는 7.8.11.15회 등 평양, 서울 등 여러 지역에서 열린 총회에 총대로 참석했다.
그러나 1910년대 일본이 허위 날조한 105인 사건과 3.1운동 등으로 많은 교역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이 당국에 체포됐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양전백(1915년평북노회장,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유여태, 김병우, 이승훈, 이명룡 등을 비롯 많은 교인들과 함께 차형준 목사도 잡혀갔다. 이후 1929년 평북노회에서 용천 남시구역 사면을 하며 풀려났다.
이후 일본은 1940년 국내의 각 교단을 일본의 어용기관으로 활용하며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조직을 통일하려 했지만 평북노회는 변질하지 않은 채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차형준 목사는 1930년대에도 충남, 철산 등 각지에서 목사 활동을 하다가 1943년 사망했다.
한편 194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차형준 목사의 3남 차경섭씨는 아버지의 선교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는 대신 활발한 의료 활동으로 구원에 나섰다.
차형준 목사의 아들 차경섭씨는 1960년 중구 초동의 옛 스카라 극장 자리에 차산부인과 의원를 개원했고, 이를 모태로 차광렬씨(차 목사의 손자, 現글로벌차바이오연구소장)는 1984년 강남 역삼동에 강남차병원을 개원했다. 이후 차광렬씨는 ‘승승장구의 신화’ 현재의 차병원그룹을 일궈냈다.
차병원그룹은 이 같은 선교정신을 토대로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등 국가에 이바지한 분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의료 지원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차병원은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씨의 직손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수술 등의 의료 행위를 지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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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
◇ 한국 기독교 부흥과 성장
독립운동가들의 얼이 깃든 평양신학교는 1908년 5월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지원으로 신학교 교사가 2층 규모로 건축되었고, 맥코믹기념 기숙사(맥코믹) 알렉산더기념 기숙사(남장로교), 마르다기념 기숙사(북장로교), 빅토리아기념 기숙사(호주장로교) 등 6동의 기숙사가 건축되었다. 1916년, 평양신학교는 6명의 정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진이 참여하여 1918년부터는 현재까지도 발간되고 있는 “신학지남”을 발간하고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한편 레이놀즈의 책임하에 “성경사전”을 발간하여 성경공부 학습자들을 위한 중요한 부교재가 되었다. 1921년, 5년 신학과정이 1년2학기 3년 과정으로 개편되었고, 교회지도자 과정으로 6주 2년 과정이 개설되었다.
장로교신학교는 한국장로교 선교회 사역의 “사경회제도”의 성장에 따라 제도화 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캘빈주의를 배경으로 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을 수납하고, 장로정치를 수용한 성경중심의 학교로서 개별적 연합에서 총회로 이관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장로교신학교는 구학파 신학을 계승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의 전통과 맥을 잇고 복음주의와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을 다시 후대에 까지 연결해야 하는 중요한 오늘을 보내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신학생들은 신구약 전권을 공부해야만 하고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 가르치며, 성경을 진실로 신앙하고, 바르게 이해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했다. 동정녀 마리아탄생,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희생, 육체적 부활, 기적의 역사성과 역사적 재림 등 전통적인 교리를 계승하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신학교육은 계속되었다. 평양신학교는 목회자, 설교자, 전도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이러한 복음주의적 신관과 사관은 매우 엄격하고 정확하게 교육 되어야 하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10년 백만인구령운동은 마펫(마포삼열)과 알렌(곽안련)과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 등과 같은 맥코믹신학교 출신자들이 주도하였다. 1934년, “선교50주년 희년기념예배”에서 마펫은 한국교회에서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고, 그 십자가의 도가 한국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켰다고 전하였다.
마펫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서 행정과 탁월한 지성을 겸비하며 평양신학교가 한국신학교의 정통성과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알렌 선교사는 신학교 교재인 설교학과 예배학을 발간하고, 레위기, 민수기, 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욥기, 시편, 소선지서 6권, 공관복음에 이르는 표준성경주석을 편찬하였다.
레이놀즈는 유니온신학교의 존경받는 신학도로 45년간 한국의 순회선교사와 성경번역가와 신학교 교수로 헌신하였다. 이후 한국최초의 남궁혁교수(1927)가 초빙되고 그 후 이성휘교수(1930)와 박형용박사(1930)가 교수에 초빙되는 등 점차로 한국인 교수들이 확대되었다.
1938년 9월 제 27차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적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순교한 이들이 50여명이었고, 반대하다 옥중에서 해방되면서 출옥한 성도들도 약 50여명이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서다 주기철, 최봉석, 박관준, 박의흠, 서정명 등이 함께 순교했으며 위와 같은 사건으로 평양신학교는 폐교를 당하게 됐지만 평양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들은 한국 기독교사의 지속적인 부흥과 성장에 갈망하며 한국교회를 일깨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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