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가운데 가장 시선을 끈 인사는 최룡해(66) 정무국 부위원장, 박봉주(77) 내각총리, 황병서(76) 군 총정치국장이다. 이들 3인은 각각 당(黨)·정(政)·군(軍)을 대표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포진, 김정은 시대의 '삼두체제'가 구축됐다는 말이 무성하다.
상무위원은 북한의 실세 중에 실세가 차지하는 자리다. 기존에 김정은 위원장과 대외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3인에서 이번에 박봉주 총리와 최룡해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포함됐다. 이제 상무위원은 기존 3인에서 총 5명의 진용을 갖추게 됐다.
이번 제7차 노동당 대회에서 경제 관료출신인 박봉주 총리는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군사위원에 이름을 동시에 올린 점이 매우 주목된다. 박봉주 총리는 군을 당적으로 지도하며 이끄는 황병서에 이어 두 번째로 호명됐다. 북한 인민군은 조직 특성상 노동당의 지휘를 받는다. 조직 위계상 박봉주는 인민군을 지배하는 당 서열 3위인 셈이다. 민간인 내각총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면, 2016년 5월 21일 발표한 강석주 전 국제비서의 장의위원 53명 명단에서 7차 당 대회로 재편된 북한 '파워 엘리트'의 면모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당 대회에서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5명)에 새롭게 진입한 최룡해는 장의위원 서열 1위에 오르며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상무위원인 황병서(총정치국장)와 박봉주(내각 총리)도 각각 장의위원 2번째와 3번째에 포진했다.
여기에서 공통 감지되는 것은 김정은 체제에서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 박봉주 내각 총리(朴奉珠)의 두터운 각별한 신임이다.
밑바닥 노동자에서 총리까지
경제통인 박봉주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당에서 맡은 또다른 역할로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겸임하게 된 것은 김정은 정권이 이번 7차 노동당 대회에서 거듭 천명한 ‘핵-경제 병진노선’ 강화의 의도이다. 내각총리로서 경제와 민생을 챙기는 것은 물론 군수산업 강화 등 군사력 증강을 내각 차원에서 지원하라는 이중적 포석으로 간주된다.
북한에서 가장 개혁적인 경제통으로 알려진 박봉주 내각총리(76세)! 밑바닥 노동자에서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인 박봉주는 일제 강점기 시대 함경북도 성진시(현 김책시) 출생(1939년 4월 10일생)으로, 덕천공업대학을 졸업한 경제기술 관료다.
박봉주는 1962년 평북 용천식료공장 식료품 공장장을 시작으로 1980년 6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에 뽑혔다. 1983년에는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 당위원회 책임비서를 거쳐 1993년부터 조선로동당 경공업부 부부장을 맡았고 1998년부터 장관급인 화학공업상에 올라 2003년 9월까지 있었다.
2003년 9월 3일 홍성남 후임으로 북한내각 국무총리에 임명됐으나 2007년 4월 11일 해임됐다. 해임 사유는 ‘선군정치’ 시대에 군수경제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이며,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박봉주는 유류 사용 문제를 놓고 군부와 갈등을 빚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박봉주 총리의 실각 배경을 세밀히 살필 필요성이 요망된다. 김정일 시대인 2002년 7월 북한이 발표한 ‘7·1 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는 개혁·개방 기대를 한껏 드높였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틀 안에서 시장원리 일부 도입의 시도로서 물가ㆍ임금 현실화를 통한 가격개혁, 공장ㆍ기업소의 자율성 확대, 개인경작지 확대 및 실험적 개인영농제 실시 등이 7·1조치의 핵심이자 근간이었다. 1년 뒤에는 비공식적으로 운영돼 온 장마당을 종합시장으로 공식화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6ㆍ15 남북정상회담 후 활발해진 남북교류도 우호적 여건으로 작용했다.
이 조치의 밑그림과 시행을 주도한 인물이 이번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핵심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합류한 박봉주 내각총리다. 2002년 7ㆍ1조치 발표 당시 화학공업상이던 2003년 9월 내각총리로 발탁돼 종합시장 활성화, 협동농장 개혁 등 경제개혁을 주도하였는데, 북한 기득권층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당시 박 총리는 평양과 평성 등 전국 각지에 종합시장을 건설해 주민들에게 종합시장을 통해서 이익을 얻도록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공장, 기업소 노동자들에게는 월급을 10배로 올려주고, 공장은 독립채산제 운영으로 현금수입을 올려 노동자들에게 배분으로 하는 등 주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계획경제 틀 내에서의 개혁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고 당과 군부 보수 강경파의 반대와 저항도 심했다. 결국 김정일이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박봉주는 2007년 실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 후 북한의 경제개혁은 급속히 후퇴했고, 그 정점이 2009년 12월 1일의 전격적인 화폐개혁이었다. 인민생활이 급속히 어려워지는 등 대규모 혼란이 발생했다. 북한 경제가 일정 부분 시장경제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유지되기 어려운 단계에 급속하게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결국 화폐개혁을 주도한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에게 책임을 지워 2010년 3월 10일경 처형하고 다시 시장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외 실물경제 해박한 지식
박봉주 총리는 중국과 남한을 두루 방문하면서 현실에서 외국의 경험을 많이 체득했다. 북한 주민들도 박봉주 총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한국과 미국에서는 그를 실무형 개혁파로 인정하고 있다.
박봉주 총리는 2002년에 화학공업상의 자격으로 그해 10월 북한 경제시찰단으로 남한을 8박9일 방문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각종 산업현장을 돌아보았다. 당시 처형된 장성택 전 국방위 부위원장, 화폐개혁 때문에 공개 처형당한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도 동행했다.
경제시찰단이 돌아가기 전날 국내 시장을 보여 달라고 해 데려간 곳은 동대문 두산타워였다. 너무 열심히 질문하고 적어서 기자들이 이유를 묻자 박봉주는 “기자 선생, 지금 볼 게 너무 많은데, 눈이 두 개뿐이다. 말 좀 걸지 말라”고 한 일화도 있다.
박봉주는 2005년 3월에는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해 24-25일 상하이(上海)와 26-27일 선양(瀋陽)의 경제개혁 현장을 돌아보는 차례로 둘러보는 등 해외의 경제발전 역량에 대해 안목이 밝은 인물이다.
김정은 시대!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도 북한 경제가 상당히 어렵기에 경제통으로 알려진 박봉주를 총리로 재기용한 것이다. 복권 과정을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2007년 좌천된 박봉주는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전격 복권된다. 2010년 8월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9월의 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 직전이다. 이어 김정은이 노동당 제1비서로 후계세습을 이룬 2012년 4월 제4차 당 대표자회에서 박봉주는 경공업부장 자리에 올랐다.
김정은 제1비서는 2012년 4월 김일성 생일 10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김정은은 ‘사상강국’ ‘군사강국’에 이어 ‘경제강국’ 건설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중국이나 베트남식 개혁개방 노선이 아닌 스스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쪽이다.
2012년에는 북한 내부에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이 감지됐다. 흔히 ‘6·28 조치’으로 통용되는 협동농장 관리방식의 변화다. 6.28 조치란, 김정은이 6월 28일에 내놓은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 확립에 대하여”를 뜻한다.
이는 202년 4월 6일에 제시한 북한의 경제관리 개선방향을 보완한 것으로 국가의 계획적이며 통일적인 지도 밑에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 등 단위별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독자적 경영목표를 세우고 이것의 실현을 위한 전략을 세운다는 것이 이 계획의 기본 골자이다.
협동농장에 작업분조 단위를 그동안 10~25명에서 4~6명씩(사실상 가족영농)으로 작게 나눠서 관리하고, 작업분조에 따라 토지와 생산비용을 할당하는 조치가 수반됐다.
당에 생산물을 일정 분량을 보내고 남는 부분은 장마당 등에서 처분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또 텃밭도 30평 수준에서 50평, 200평으로 늘린 뒤 1000평까지 허용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박봉주 총리의 복권은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때, 그 의미가 생생하게 포착된다. 북한 노동당은 2013년 3월 31일 개최한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경공업부장이었던 박봉주를 당 정치국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튿날인 2013년 4월 1일 북한은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제12기 7차 회의에서 박봉주를 6년 만에 다시 제12대 내각총리에 앉혔다. 최영림 총리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 부위원장으로 물러났다.
북한은 김일성 시대 이후 매년 4월 우리 정기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국가의 예·결산을 비롯해 조직개편, 내각 인사 문제 등을 심의·의결하고 있는데, 북한 당국은 최고인민회의에서 개혁파 경제 관료인 박봉주를 내각 총리로 재기용하면서 장관급 인물의 대거 교체로 박봉주 총리와 호흡을 맞추도록 했다.
이들의 현장경험과 실무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경제개선 조치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는데, 이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박봉주 총리와 30년 지기인 리무영 부총리 겸 화학공업상이다. 1948년생으로 박봉주 총리보다 9년 아래인 리무영은 박봉주가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당 책임비서로 재직할 당시 친분을 맺었다.
이곳의 지배인을 역임한 리무영은 2003년 9월 당시 내각총리로 승진한 박봉주의 후임으로 화학공업상에 임명됐다. 2011년 5월 화학공업상을 내려놓고 잠시 내각 부총리직만 갖고 있던 리무영은 2013년 4월 박봉주 내각에서 다시 화학공업상을 맡게 됐다.
화학공업은 경공업 원료와 화학비료를 생산하기 때문에 북한이 강조하는 경공업과 농업의 토대가 되는 산업이다. 일단 경제 부문의 활성화는 경공업과 농업 부문에 주안점을 두려는 조치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 아래서 권력실세들의 부침이 심했지만 박봉주 총리의 지위는 굳건했다. 그만큼 김정은의 신뢰가 깊다는 뜻이다. 북한에서 가장 개혁적 테크노크라트라는 박봉주 총리가 권력의 정점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건 경제강국 건설을 위한 경제발전 5개년 전략과 관련과 무관하지 않다.
김정일 때는 체제 안정이 우선이어서 박봉주의 개혁이 군의 제동을 받았지만 지금은 체제가 안정돼 있어 박봉주를 필요로 한다. 박봉주가 김정은의 수행으로 좀처럼 따라붙지 않는 것은 독자적으로 시찰을 다닐 권한이 부여되었기에 가능하다. 김정일의 선군정치(先軍政治) 보다, 김정은이 선경정치(先經政治)을 표방만 만큼 과거 총리에게 없던 권한이 박봉주에게 주어진 것이다.
김정은의 통치방식, 조직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당 기능 정상화다. 적어도 군을 지나치게 앞세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12월 사망) 시절의 선군정치 시대와는 달라졌다.
선군정치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과 ‘고난의 행군’으로 일컫는 위기 때 체제를 지탱시키던 김정일의 비상통치 방식이다. 군 위주로 자원배분 등을 우선시 하면서 군부 영향력이 너무 커졌다. 군이 대외무역, 자원수출, 외화벌이 등 각종 이권사업까지 깊이 개입했다. 광물은 물론 송이버섯, 생수 판매까지 챙겼다.
김정은이 앞장서 이런 군부의 영향력을 줄이는 일환으로 숙청이 연이어졌다. 북한이 2016년 5월 6일에서 9일 사이 평양에서 진행된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군 원로의 상징인 리용무(91)·오극렬(86) 국방위 부위원장 등 군 원로마져 당 정치국에서 물러난 사실은 이를 극명히 예시한다. 현재 당 내에서도 정치국, 정무국 등에 군 출신은 서열이 과거보다 뒤로 밀리고 있다.
김정은 체제 하의 내각인 노동당이 군을 확실히 통제하는 게 확실하다면, 인민대중보다 군을 앞세운 선군정치는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제7차 당 대회에서 박봉주가 특히 당 중앙군사위 위원에 오른 것은 이런 면에서 주목된다.
북한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대한 박 총리의 기여를 긍정 평가하고 박봉주의 개혁 드라이브에 힘을 실어주는 차원에서 당중앙군사위원에까지 포진해 경제건설에 대한 군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한층 수월하게 됐다는 평가이다.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이유로 언급한 것이 더 이상 국방비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국방비도 줄여야 할 만큼 현재 북한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경제 문제이다.
물론 자율성을 담보한 경제 개혁을 추진은 큰 기대를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핵과 경제문제가 공존하기 힘든데, 당장 핵무장을 내려놓고 경제 문제로 갑작스런 전환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봉주 총리가 2007년 총리자리에서 숙청됐던 경험도 그가 경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박봉주 총리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지만 변화의 흐름을 북한도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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