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㉝] Anne, 홀로 쓸쓸할 때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5-29 1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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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홀로 쓸쓸할 때

이은화



멜빵바지를 입은 소년과 단발머리 소녀가 브런치를 먹고 있어 나이프를 든 소녀는 손을 떨어 마른 잎처럼 말이야
소년이 소녀의 손등에 손을 얹자 소녀가 엷은 웃음을 지어 은발에 햇살이 쏟아지는 순간이야 느리게 접시를 비우는 동안 소녀의 떨림을 이해하는 소년 얼굴에 주름이 지고 있어
자꾸 소년과 소녀를 훔쳐보게 돼 예쁠 것도 없는 은발의 풍경을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사라져
키스처럼,
그래도 키스가 필요하다는 믿음은 변함없어 사라지는 것들은 격렬할 자유가 있으니까 카페에서 홀로 쓸쓸할 때

키스는 위로가 될 수 있잖아

소년 소녀가 나란히 눕는 소리가 들려 사라진 길을 따라 은발이 되고 허리가 굽었겠지 소녀의 떨린 손을 잡아주던 소년이 떠올라 아름다운 것들은 왜 슬퍼지는지 몰라 붉음일까 초록 때문일까 느리게 접시를 비울수록 자꾸 허기가 져 딥키스가 필요한 날이야 누구라도 괜찮다면 은발 소녀의 키스를 훔칠 거야 소년과 소녀가 사라지고 있어 햇살 속 눈 녹는 듯 말이야 아직 머리칼 한 올도 훔치지 못했는데 자꾸 사라지는 소리가 들려

소년과 소녀가 숨어드는 길을 따라가면 키스를 훔칠 수 있을까 소녀 대신 누울 수 있다면 더는 춥지 않을 거야 유독 춥던 햇살을 녹일 수 있을 테니까

Anne, 키스에 갇혀 돌아오질 않기를 기도해 줘
와인 잔을 사이에 두고 늙어갈 누군가에게 식탁을 내어주고 싶어
혼자 먹는 밥은
식탁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든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노란 꽃가루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옆자리에는 낡은 트럭을 타고 온 노부부가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할아버지는 라이프를 든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지요. 수전증이 있는 할머니가 핫케이크를 자르는 동안 익숙하게 기다리는 할아버지, 노부부 사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햇살 속 퍼집니다.

멜빵바지를 입은 할아버지와 은발의 단발에 실 핀을 꽂은 할머니, 화자는 노부부의 모습을 소년과 소녀로 회귀시킵니다. 일생을 살아온 부부가 따뜻하게 늙어왔으리라고 유추하며 소녀의 삶을 소망하지요. ‘접시를 비울수록 자꾸 허기가’ 진다고 말하는 화자는 소녀의 키스를 훔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사라져 키스처럼,’ 인생의 눈부심이 소녀의 젊음처럼 순간이라며 애석함을 들어내지요. 그러나 키스가 우리 삶에 위로가 될 수 있듯 ‘사라지는 것들은 격렬할 자유가’ 있다고 전합니다.

‘Anne, 키스에 갇혀 돌아오질 않기를 기도해 줘’ 화자는 훔친 키스 안에서 머물길 원합니다. ‘더는 춥지 않을 거야 유독 춥던 햇살을 녹일 수 있을 테니까’라며 곁을 나눌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일상의 소중함 일깨우지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노부부의 아름다움이 쓸쓸함과도 결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라스베이거스 어느 시골.

맥도널드 안에서 호명되는 Anne은 누구일까요. 화자가 지칭하는 이름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이름인 듯합니다. ‘혼자 먹는 밥은/ 식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화자에게서 나이 깊어질수록 동반자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게 하네요. 황혼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시. 여행지에서 만난 노년 부부의 모습이 참 예쁩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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