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㉒] 리뷰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4-21 12: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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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인 이서화

 

리뷰


이서화


무음도 소리라고
스스로 소리를 끊은 나팔꽃들이 모두 지고
이파리들은 한가하다

더 이상 늘릴 키도 없으니/ 햇살이 귀찮기만 하다

씨방 밑으로는 험한 꼴이다 말하자면 악플러들의 댓
글들이다 뭉쳐지고 비비 꼬인 집요한 나팔꽃의 후기

한 사람이 죽고/ 꼬일 대로 꼬인 혈육들 같다
스스로 풀 힘도/ 말끔하게 지울 패스워드도 없다

온 들판과 산에 리뷰들이 한창이지만 어두운 문장으로
서식하듯 방치의 가을이 깊어 가는데

이 공터에 와서/ 보라색 소리의 맛을 보았으나
말끔하게 포맷(format) 중이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시 평론) 보라색 소리의 맛은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보라색 소리의 맛’ 3어절 안에 시각과 청각과 미각의 감각적 전의를 담고 있는 이서화 시인의 「리뷰」, 나팔꽃은 억울하겠다. 여름에 피는 많은 꽃 중 하필 나팔꽃이라니! 나팔을 가졌으나 불면 향기만 날릴 뿐, 밤은 어둠을 담고 아침은 햇살을 담았을 뿐인데 나팔꽃이 지고 난 뒤 무성한 악플이라니, 나팔꽃은 이 무성한 소문을 알고 있을까. ‘나팔꽃들이 모두 지고 이파리들은 한가하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알았다면 잠시 머물다 가는 생이 참 가혹했으리라.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세상에서 나팔꽃도 잠시 누군가에게 기대어 자리를 잡았을 뿐. 옆 가지를 타고 조금 높이 올라 세상을 보았을 뿐. 훔친 것이 있다면 햇살과 바람, 이슬뿐이었을 텐데 말이다. 하고 싶은 말 많지만, 맑은 풍경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나팔꽃, 벌과 나비 날아들어 속을 헤집어도 속상하다는 말 아끼던 생몰인데 악플이라니! 꽃 지며 그 흔적 남겼다고 이리도 시끄러울까.


‘온 들판과 산에 리뷰들이 한창’인 세상, 지금도 가상공간에서는 뜨거운 태형이 계속되고 있구나. 비뚤어진 소통 방식이 공격성으로 드러나는 사회. 익명성의 잔인함과 집단 속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시인은 ‘보라색 소리의 맛을 보았으나’ 동요하지 않고 지우는 중이라고 말한다. 나팔꽃을 소재로 삼아 익명성의 세태를 풍자한 시인, 시적 모티브를 낚아채는 노련함이 재미있다.

악플이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가혹한 일. 나팔꽃이여! 네 생몰의 흔적은 이제 너의 몫이 아니다. 벌떼 같던 악플러들은 있으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익명 속에 숨에 기생하는 가시 돋친 넝쿨들에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방치의 가을이 깊어 가는’ 계절 나의 생도 부끄러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리뷰에 답글 남기고 간다. 옛 명언에 ‘죄는 반드시 그 주인을 찾는다고 했으니’, 부디 그곳에서 고요하게 편히 쉬어라.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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