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주인 역할 하던 ‘집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림삼 시인 / 기사승인 : 2013-07-17 0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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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삼의 '살며 사랑하며' [일요주간=림삼 시인] “현대 사회와 ‘가정’에 필요한 ‘집사람’은 성을 초월하여 ‘가정’을 책임지고 가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5월 ‘가정의 달’, 그리고 6월 ‘호국의 달’을 넘어 7월의 초입이 계절의 변화를 왕성하게 느낄 수 있는 절정인것을 보면 아마도 살아감의 의미를 가장 진솔하게 표현하고픈 욕구가 충만하기 때문일 게다.

우리 인류의 항구적 주제인 가정의 주춧돌 ‘집사람’의 애환과 소망들을 진솔하게 풀어보고 싶다.

‘집사람’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다. 젊은 세대에서는 잘 쓰지 않지만 우리 또래에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부르던 ‘아내’나 ‘부인’의 또 다른 호칭이다.

이 호칭이 여성의 인격을 지극히 존중하거나 인정하는 의미의 존경을 담은 표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비하하거나 함부로 격하시켜서 부르는 호칭은 아니다.

그냥 ‘남편’을 밖에서 일하면서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집안의 대표라는 의미로 ‘바깥양반’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비교하여 반대급부적인 성향으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며 뒷바라지를 한다는 뜻에서 ‘안사람’과 더불어 보편적인 통칭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이 호칭이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는 사람이나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누가 뭐래도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생활의 양식과 ‘가정’에서의 역할들이 다변화되고, 핵가족이라는 단촐한 가족 구성원으로 이른바 식구들이 분산되고, 현대에 와서는 특히 집안에서 보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밖에서 모두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보내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그 호칭의 진정한 의의와 필요성이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가정’이라고 하는 튼실하고 건강한 뿌리에서 가족들이 각각의 줄기와 잎을 피어올리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꽃과 열매로 맺어진다는 고전적인 ‘가정의 역할론’은 이제 동화나 역사에서나 나오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모든 것이 편리해졌고 유용한 기계와 창작물들이 밀물처럼 밀려듦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의 질이 그만큼 높아지고 윤택해졌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유발된 폐해도 만만치 않고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가정의 해체’라고 단박에 말하곤 한다.

오늘날에 있어서 ‘가정’이라는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그 ‘가정’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제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랑과 이해로 넘쳐나던 ‘가정’, 조금 부족하여도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힘을 북돋아주던 ‘가정’, 활력과 충전을 심어주며 세상을 향해 힘차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던 ‘가정’, 지치고 힘든 육신을 끌고 돌아오면 안락한 휴식과 피난처의 역할로 영원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가정’은 지금 과연 얼마나 그 힘을 발휘하면서 우리에게 꽃을 피우라는 속삭임을 들려주고 있는가?

그리고 제언컨대 다시 돌아온 ‘집사람’은 비단 여성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와 ‘가정’에 필요한 ‘집사람’은 성을 초월하여 ‘가정’을 책임지고 가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가족들이 쉽게 기대고 고민을 상의하고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다.

나만 잘 살고 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넘쳐나는 이기주의,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윤리가 실종된 사회구조, 왕따와 집단 폭력이 별 것 아닌 장난으로 치부되고 고귀한 인권조차 우습게 간주되는 방종과 일탈이 보편화된 행태, 스스로 자초하는 고독과 독선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현대병 환자들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모습들. 이런 것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이대로 방치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슨 낯으로 미래의 빛나는 영광과 보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

한 여고생의 이야기가 세상을 울린 적이 있다. 그 여고생이 어느 날 주저하다가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우리 반에 왕따를 당하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나는 그 친구가 불쌍해서 말을 걸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데 다른 아이들이 싫어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러자 엄마가 바로 대답한다.

“얘가 큰 일 날려고 그래?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마. 괜히 남들에게 욕 먹지 말고.”

그리고 이틀 뒤 그 여학생은 세상과 작별했다. 왕따 여학생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마지막 글을 써놓고.

정말 너무도 많이 망설이다가 최후의 방법으로 엄마에게 상의하기 위하여 넌지시 돌려서 표현을 했던 것인데 이것저것 일이 많고 바쁜 엄마는 그런 딸의 상담을 들어줄만 한, 딸의 말 속에 담긴 속뜻을 파악할 만 한 여유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이기에 학교에, 학원에, 그냥 방치하듯 맡겨버리고 엄마는 열심히 돈을 벌어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뒷바라지를 해주고 좋은 옷과 좋은 소지품을 사주는 게 바람직한 도리라고 믿고 있는 이 시대의 엄마들, 어떤 방법이든 밖으로 나가서 사회 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인 도움도 주고 집안의 일도 병행하는 게 바람직한 자세라고 하며 남녀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소위 ‘슈퍼맘’들.

그들은 지금 가족과 대화할 시간이 없다. 가족을 돌아보고 챙길 여유가 없다. 다른 가족은 각각 알아서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너무도 바쁘니까, 쌓인 업무가 산더미 같으니까.

필자가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살았다. 그 때 기억으로는 어쩌다가 집에 동냥을 오는 거지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언제나 거지들이 오면 한결같이 쌀이나 다른 곡식들을 인색하지 않게 바가지로 퍼주시곤 했다.

그것이 인근에 소문이 나서 거지들이 더 자주 왔던 것 같다. 그 뿐 아니라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집안의 여러 가지 물품들로 적선을 하시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을 마을 사람들은 ‘큰손 집’이라고 불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어머니의 그 행동이야 말로 ‘집사람’의 진정한 실천적 교훈이었던 듯하다.

당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에게까지 참다운 ‘살림살이’의 혜택과 덕을 베풀어주신 그 기억이 오늘까지도 참다운 ‘집사람’의 표상으로 여겨져 필자의 뇌리에 각인되어 좌우명을 던져주고 있다.

타인을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쁨이 능력의 또 하나의 표현인 것처럼 되어버린 세상, 바쁘게 사는 것이 진정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오판하고 있는 게 오늘의 세상 모습이다.

그 ‘가정’의 중심에서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가족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보살피며 언제나 정다운 안주인 역할을 하던 ‘집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다시금 그런 ‘집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예컨대 ‘살림살이’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서 유래된 말이고 보면 ‘가정’을 살려내는 진정한 ‘집사람’이 이제 다시 ‘가정’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 이름의 값어치가 상실되어가던 ‘집사람’이 지금쯤이면 금의환향 하듯이 되돌아와서 ‘가정’을 지키는 명실상부한 파수꾼으로 자리매김 된다면 참 좋겠다.

목이 타게 부르노니, ‘집사람’이여! ‘가정’으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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