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칼럼] 섬(stop)·숨(breath)·쉼(rest)

육인숙 작가 / 기사승인 : 2013-08-14 10: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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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의 풍경소리(4)
▲ @Newsis
[일요주간=육인숙 작가] 우리는 늘 바쁩니다. 한창 뛰놀아야 할 아이들은 경쟁이라는 날개를 달고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날아다니느라 바쁘고, 젊은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슨 일을 해야 행복한지 인식하지 못한 채 허울만 좋은 스펙에 떠밀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느라 바쁩니다. 또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이 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진 벼랑길 위에서 진퇴의 고통으로 혹은 접고 혹은 버리고 혹은 해하며 갈팡질팡합니다. 휴식은 물론 막막함과 허망함도 잠시, 시작도 끝도 없는 삶의 급물살에 다시 무방비상태로 휩쓸려갑니다.

게다가 마음과 세상의 행로는 어긋나기만 하지요. 지쳐 쉬고 싶은데 더 뛰라 떠밀고, 혼자 있고 싶을 땐 들쑤시며 가만히 놓아두지 않다가도 막상 누군가 필요할 때는 아무도 없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데 떠들라 재촉하고, 먹고 싶지 않아도 어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퍼 넣어야 합니다. 벗어던지고 싶어도 입어라, 걸쳐라 하니 속에서는 헐고 곪아 썩은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겹겹이 껴입습니다. 누군가 이렇다 저렇다 하면 금방 귀가 솔깃해지고 마음도 긴가민가합니다. 무엇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발전과 성공, 부와 명예라는 미명하에 밀면 밀리고 끌면 끌려갔습니다. 엎어지고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실리의 무게가 쏠리는 쪽을 택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당연시했습니다. 그래야만 잘사는 길이라 여기고 성공하는 지름길이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내가 만든 가정(假定)이고 함정이며 내가 선택한 가면인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마주서는 내가 몇이나 되는지, 얼마나 흔들림 없이 진솔한 나로 살고 있는지 굳이 확인하고 마주서려고도 않습니다. 오히려 들키지 않기 위해 더 두껍고 현란(眩亂)한 가면으로 위장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내가 살아야 비로소 존재하는 세상인데 살기 위해 나를 저버려야 하다니.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고 현주소입니다.

섬(stop)·숨(breath)·쉼(rest)!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오느라 우리 모두, 애 많이 썼습니다. 이제 하던 일 멈추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쉬면서, 우리는 잠시 쉬어야 합니다. 휴식은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몫이니까요. 그러면서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고 인식하지 못했던 일들 마음눈과 마음귀로 살피고, 심장의 열기도 식힐 겸 가슴 판 활짝 열어 프레스토(Presto)로 돌아가는 삶을 아다지오(Adagio)로 재설정해야 합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혹은 푸른 숲길을 안단테로 걸으면서 혹은 나무에 기대어 시간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혹은 아무도 없는 방에 차분히 앉아, 무료(無聊)하게 끌려가던 일상을 잡아 세우고 가슴 아닌 배로 숨을 깊이 고르면서 심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이렇게 멈추고 숨을 고르고 쉬면서 재충전하는 일,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0세 이전부터 난청증이 시작된 베토벤은 남몰래 치료를 받았으나 진전이 없자 의사의 권유로 한적한 시골로 요양을 떠납니다. 지금과 같은 여름이었지요. 베토벤은 주로 산책을 하면서 음악을 구상했는데 귓병이 심해지면서 그 일은 더욱 잦았습니다. 고요한 산기슭과 시냇가를 거닐며 투사되어 열린 마음귀로 자연의 소리와 모습을 내면 가득히 담아 물들였지요. 그렇게 해서 탄생된 곡이 군더더기 없이 평화롭고 낭만적인 교향곡 6번 <전원>입니다. 귀가 굳게 닫히자 베토벤은 아예 인간세상을 피해 고요한 곳만을 찾아다니며 음악 앞에 정제된 자아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런 산고 끝에 출산한 곡이 바로 장엄미사<미사 솔렘니스>와 교향곡 9번 <합창>입니다.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처럼 숭고한 겸허와 충만한 환희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음악이 아름다움을 넘어 견고한 감동으로 가득 찬 이유는 숙명 같은 고통과 당당하게 마주선 생생한 투혼이 선율 곳곳에 서려있어섭니다. 또 거침없이 달려드는 수많은 필연과 운명을 마음 기울여 고스란히 포옹했던 연유였습니다. 베토벤은 이런 말을 했다지요. “나는 스스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태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어남과 선택은 우연이었습니다. 그 우연이 필연이 되고 선택이 운명이 되는 것은, 진아(眞我)와 직면했을 때 비로소 확정되는 것입니다. 정신의 본질로 결집되는 절대고독을 통해 참자아를 발견하고 삶을 재인식하는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생의 황홀경까지 경험하게 되지요. 세상에서 유일한 진실과 맞닥뜨렸으니 절로 솟구치는 환희를 어떻게 주체할 수 있을까요!
많은 예술가들이 호젓한 시간을 좋아한 이유도 그 안에 섬·숨·쉼의 매뉴얼이 작동됨을 알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 시간 이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맛보았던 것이지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아주 잠시 내 생각과 내 생체와 내 소망을 ‘섬·숨·쉼’의 리듬에 맞춰보십시오. 일 년 사시사철 늘 항상 인생의 진정한 멋과 휴식 그리고 마음의 결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휴가는 무사했나요? 休暇(휴가)의 休는 '쉰다'는 뜻이고, 暇는 '틈' 혹은 '겨를'이라는 뜻입니다. 겨를이란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말합니다. 곧 휴가란 “일상에 매였던 사람들이 잠시 생각을 환기하고 겨를을 누리며 쉬는 일”이 됩니다.
굳이 어디론가 가는 것이 휴가라면 내 안으로 들어가 쉬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세모인 내가 굳이 네모가 되기 위해 상처 내고, 독인 줄 알면서 긁고 깨고 뜯어내며 덧칠하고 덧입으며 숨 가쁘게 살지 않아도 될 터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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