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파워엘리트 리용호...외교 총괄사령탑 '핵문제 최대 관건'

소정현 / 기사승인 : 2016-10-24 11: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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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파워엘리트 외무상 ‘리용호’
▲ 올해 60세로 핵 문제를 비롯한 대미 협상에 참여하면서 북한의 차세대 외교 주역으로 주목받아온 리용호외상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아버지는 리명재 전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주영 북한대사 역임, 6자회담 수석대표 맡기도

부친이 모친의 생명 빼앗은 가족 비극사 전해져
미국과 대결이 아닌 대화 원해 진정성 대시험대



북한 새로운 외무상에 리용호 등장

미국의 소리(VOA)와 AP통신은 北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맡았던 강석주가 지병으로 물러나면서 리수용 외무상이 당 국제담당 부위원장으로, 리용호 부상이 외무상으로 임명되면서 북한의 외교라인이 새롭게 개편됐다고 2016년 5월 17일 보도했다.

북한 외교의 세대교체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북한 외교의 대표격이 김정일 시대의 강석주에서 김정은 시대의 리용호로 바뀐 셈이다. 1994년 북미 기본합의 당시부터 북한 외교의 주역이었던 강석주는 결국 5월 20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전임 리수용 외무상은 정치국 위원 겸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노동당 국제 담당비서였던 강석주를 대신했다.

강 전 비서는 1984년 외무성 부부장에 임명되고 나서 1987년 외무성 제1부부장, 1998년 외무성 제1부상, 2007년 외무상 직무대리로 각각 승진하며 북한의 대미협상을 이끌었다. 강석주는 2010년 내각 부총리에 임명돼 지난 2014년 4월까지 부총리직을 수행했다.

주스위스 대사를 지내며 당시 스위스에서 조기유학 중이던 김정은을 살핀 이수용 전 외무상은 지난 5월 노동당 당 대회에서 노동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국제담당 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수용의 후임으로 외무상이 된 리용호는 이번 당직 인사에서 두 단계 오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부친은 고위관리,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

1956년생으로 올해 60세로 핵 문제를 비롯한 각종 대미 협상에 참여하면서 북한의 차세대 외교 주역으로 주목받아온 리용호는 1956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남산중학교와 평양외국어대 영어문학과를 졸업한 뒤 1978년 외무성에 입사해 줄곧 외교관의 삶을 걸어왔다. 외무성 국제기구국 과장과 부국장, 주영 북한 대사를 지냈다. 그리고 부친은 리명재 전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김정일의 신임이 컸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주요 직책의 외교관이 물갈이 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북한은 한 분야에서 갈고닦은 전문 외교관들이 자기 직무를 수행한다. 역대 외무상만 보더라도 남일 9년, 박성철 8년, 허담 13년, 김영남 15년, 백남순 9년, 박의춘 7년으로 평균 10.1년의 임기를 수행했다. 특히 강석주, 김계관, 리용호로 이어지는 대미 외교라인은 1990년대 초부터 20년 넘게 미국과 협상을 담당하고 있다.

리용호는 20여 년간 북한 외교의 간판으로 활동해온 김계관의 뒤를 이어 2010년 부상 자리에 올랐다. 지난 5월 열린 7차 노동당 대회를 통해 리수용의 후임으로 외무상에 오른 이용호는 1990년대 초부터 핵협상에 참여했고 2011년에는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지난 2011년 7월 인도네시아 발리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계기에 남측 위성락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접촉을 가졌고, 글린 데이비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접촉을 통해 2012년 ‘2.29합의’를 도출하기도 했다.

2012년과 2014년 뉴욕과 평양에서 이용호를 만났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미국의 소리(VOA)에 “김정은이 리용호를 외무상으로 발탁한 것은 미국과 대결이 아닌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정부 소식통도 “북미 고위급 회담과 관련해 경험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조엘 위트 미국 존스홉킨스대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 리 외무상에 대해 “사안을 잘 아는 매우 실력 있는 사람으로 북한의 이익을 강하게 대변하지만, 최소한 말은 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북한 사람들보다 더 유연하다거나 더 합리적이라는 건 아니다. 북한 사람들은 세계를 보는 자신들만의 관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부연한다.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 참석한 리용호를 만난 한국 측 인사들도 “매우 세련됐고 영어도 유창했다. 북한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동방연구소 한국몽골 과장은 리용호 외무상이 “북한 외교부에서 미국통 전문가 1호”로 통하며 북한 외교계에서 보기 드물게 “문명화된 사회에서 통용되는 외교술”을 지녔다고 러시아 언론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다. “북한의 대외 정책이 보다 유연해지고 미국과의 관계 형성에 새 변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 사망한 강석주 전 비서는 1984년 외무성 부부장에 임명되고 나서 1987년 외무성 제1부부장, 1998년 외무성 제1부상, 2007년 외무상 직무대리로 각각 승진하며 북한의 대미협상을 이끌었다.
어머니의 충격적 비밀

그런데 리용호에겐 충격적 비밀이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 손에, 그것도 총에 맞아 죽었던 것.리용호가 외무성에 입사한 것이 1978년인데, 이듬해인 1979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전언을 해준 사람은 1982년 서울로 망명했던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다. 이한영은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이다. 덕분에 이한영은 남쪽에 망명한 1982년까지 김정일의 부화방탕한 생활을 너무 생생히 목격했다.

그가 증언한 리명재가 부인을 쏴 죽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김정일이 밤에 여자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자주 열었는데, 부르는 측근 중에 리명재가 있었다. 그러니까 리용호의 어머니가 자꾸 남편이 만취해 새벽에 들어오니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뒷조사를 해봤다. 그러다가 남편과 김정일이 밤새 연회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리용호의 어머니는 김일성에게 편지를 썼다. ‘수령님이 이 부화방탕 파티를 좀 그만두게 해주세요’하고 말이다. 1979년쯤 되면 그때 벌써 이미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편지를 김정일이 중간에서 다 가로채 검열할 때였다.

김정일이 단단히 화가 났다. 리명재를 불러다 “너 아내 건사 잘해라. 이러고 다닌다”고 추궁하니 그가 “장군님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년은 쓸모없습니다. 죽여버릴까요” 이랬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명재가 총을 들고 가서 아내를 쏴 죽였다고 한다. 리용호 입장에선 자기 어머니에 얼마나 한이 맺혔겠는가?

‘핵과 경제’ 병진 전략 구사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북한은 헌법에 핵보유국 지위를 명문화 하고 관련 법규의 제·개정을 통해 핵 보유 및 관리를 제도화 하고, '경제핵병진노선'을 통해 핵무력 강화와 핵기술의 민수경제로의 전환을 천명해왔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 2016년의 9월 9일 제5차 핵실험이다. 북핵 문제는 2016년 1월 6일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2월 7일 여섯 번째의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이어 북한이 9월 9일 오전 9시30분 5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지난 1월 6일 4차 핵실험 이후 8개월 만이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 결의 2270호를 포함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가 진행 중임에도 지난 1월 6일 4차 핵실험 이후 8개월 만에 9월 9일 함경북도 풍계리 지역에서 그 동안의 핵실험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진도 5.0 TNT 10kt 이상에 맞먹는 폭발력을 갖는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핵탄두가 표준화, 규격화됨으로써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되어 보다 타격력이 높은 각종 핵탄두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위기감 때문에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대응도 과거와는 크게 달랐다. 4차 때를 먼저 간략하게 실펴보자. 정부는 개성공단의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국제사회를 향해 ‘북한의 돈줄 죄기’ 동참을 호소했다. 국제사회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3월 2일 유엔 안보리는 특정국에 대한 비군사적 제재조치로는 최강으로 평가받는 결의 2270호를 채택했다.

미국과 중국이 합의하고 러시아가 수정하여 최종 확정된 결의 2270호는 유엔헌장 제7장 41조에 의거하여 채택된 것으로 북한의 대외교역,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수출입, 금융 및 재정 등에서 강력한 제재조치들을 규정했으며 북한의 많은 조직과 단체 그리고 개인들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안보리는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결의 1695호를 채택한 이래 핵실험이나 장거리 발사체 시험을 할 때마다 제재 결의를 통과시켜 지금까지 1718호, 1874호, 2087호, 2094호 등 다섯 번이나 결의를 채택했지만, 2270호는 이들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강력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 북한은 어떤 대응으로 응전하고 있을까? 일본 NHK 방송에 따르면, 전 외상 이수용은 “미국의 끊임없는 핵 전쟁 연습으로 조성된 위험천만한 정세는 세계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다른 문제에서도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핵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화도 해보고, 국제법에 의한 노력도 해봤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라며 “이제 남은 것은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것뿐이다”라고 북한의 핵 개발을 미국의 탓으로 돌렸다.

김정은 정권은 핵 비확산과 지역안정에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과 중국에 ‘우리식 사회주의’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은 또 한미일 대북 제재 공조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명분으로 핵무장력을 강화하고 그것을 체제 결속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를 위시하여 한국은 강대강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북한의 5차 핵실험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자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맹비난했고, 중국 측은 ‘결연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지난 9월 9일 북한이 감행한 5차 핵실험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추가 대북제재 논의에 들어간 가운데, 미국 시간으로 9월 18일. 윤병세 외교장관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위무상은 뉴욕에서 회담을 갖고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응해 공조와 협력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국과 미국, 일본이 ‘대북 제재 강화’를 강력히 밀어붙이는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추가 제재 결의에는 동의하지만, 동시에 ‘대화와 협상’도 강조하는 상황이다. 또한 평양주재 영국 대리대사를 지낸 짐 호어 박사는 올해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어 북한과의 대화 국면으로 전환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궁극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의 대안은 대화와 협상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 포기를 하지 않은한 단순한 대화는 북한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북핵 국제공조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대화라 할 수 없다.

그러기에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은 더 어려워졌다. 북한은 추가 제재를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핵 위기를 더 조성해나갈 것이다. 더욱이 미국 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로 미중, 한중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에서 유엔안보리가 더욱 강력한 대북 제재를 채택하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상대적으로 더욱 강력한 제재를 채택하더라도 ‘핵 강국’을 추구하는 북한이 굴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할 것이다.

특히 한미 양국은 ‘제재’에만 무게를 싣고 있다”면서 “미사일방어체제(MD)의 일환인 사드(THAAD) 배치만 밀어붙이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미 양국의 북의 잇따른 공세에 따른 비난과 제재로만 맞서고 있는 현 상황은 북한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이는 북한의 핵 능력 강화라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의 강경, 압박 일변도의 접근은 상황 관리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접근법을 좁힐 수 있다. 대화를 보상이나 양보로 간주하고 주관적인 판단 하에 압박 모드에만 집중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북의 핵능력 강화에 일조할 뿐이다.

북한 지역을 휩쓴 수해피해 반전의 계기?

지난 8월 29일부터 9월 2일 사이에 함북도 지구를 휩쓴 태풍으로 인한 홍수 피해는 해방 후 처음으로 되는 대재앙으로 기록된다. 두만강 유역에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려 두만강이 범람하면서 회령시, 무산군, 연사군, 온성군, 경원군, 경흥군과 나선시의 일부 지역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조선중앙TV에 따르면 사망자와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피해는 수백 명에 달하며 6만8천900여 명이 집을 잃고 한지로 내몰렸다. 1만1천600여 채가 완전파괴된 것을 비롯해 주택 총 2만9천800여 채가 피해를 봤으며, 생산 및 공공건물 900여 채도 손상됐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국제사회의 도움을 청하기 어렵다. 핵실험으로 조성된 싸늘한 시선 때문이다. 유엔기구도 50~60년 만에 최악의 수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의 대상이 대체로 문제국가라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그러기에 현실적으로 박근혜 정부에 실용주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원한다 해서 바뀔 정세도 아니다. 하지만 인도주의는 ‘야만의 전쟁’ 중에도 작동하는 ‘문명의 증거’다. 불량국가의 주민들이기에 재해가 남긴 기아와 병마에 방치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미외교라인 세대교체가 앞으로 어떻게 북미 관계를 이끌어 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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