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조시대에는 신하를 충신과 간신, 모신과 역신으로 나누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런 명칭은 사라졌지만, 사람을 가르는 기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책임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능력을 갖춘 사람과 권력만 좇는 사람은 지금도 분명히 존재한다.
성숙한 시민 사회, 고위공직자 임명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염치가 있는 사람인가이다. 인사청문회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관이 능력과 경력만 따지는 것이라면 청문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국가의 권한을 맡길 사람인지,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사람인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인지 살피기 위함이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우리 정치에서 ‘염치’라는 말은 어디로 사라졌는가를.
‘오빠 로비’가 공익 민원으로 둔갑하고, 약자를 보호한다던 정치인이 필요할 때는 특권을 요구한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약자의 이름을 앞세우고 불리하면 정치적 공격이라 한다. 이쯤 되면 국민이 헷갈리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상식이다.
약자를 위한 정치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약자의 삶을 존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약자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고 약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약자의 삶을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순간, 약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소모품이 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청탁 의혹도 국민이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후보자의 청탁을 통해 업체 대주주가 임상 승인 직전 자신의 주식을 처분해 63억 원을 벌고, 청탁을 알선한 브로커가 그 대가로 6억 원의 투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 과정에서 3만여 명의 소액투자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면 국민은 당연히 묻게 된다. 그것이 정말 공익 민원이었는가.
김 후보자는 공익을 위한 일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공익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모든 행위가 공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의도를 주장한다고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거액의 이익을 얻고 수많은 투자자가 손실을 떠안았다면 그 과정과 의도를 따져 묻는 것이 국민의 상식이다. 공익이라는 이름이 사익을 감추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용혜인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21년 두 달 된 아이를 안고 국회에 등원하며 자신을 ‘30대 워킹맘’의 상징처럼 내세웠다. 사회적 약자를 이야기하고 기본소득을 주장하며 약자를 위한 정치를 강조했다. 정작 자신은 그러하지 못한다. 양손에 떡을 줘고 다 먹겠다는 욕심은 혀를 내둘리게 한다. 그뿐인가. 가족여행을 하면서 공항 귀빈실을 요구하는 등 특권 논란이 불거진다면 국민은 묻게 된다. 평범한 워킹맘의 삶은 그렇게 고단하다면서 왜 자신에게는 특별한 대우가 필요한가.
국민이 화가 나는 것은 귀빈실 하나 때문만이 아니다. 그 속에 보이는 이중성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삶을 말할 때는 ‘우리도 힘든 사람’이고, 특권을 요구할 때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면 국민은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가.
정치인도 실수할 수 있다. 잘못 한두 번 했다고 사람 전체를 매장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잘못 자체보다 잘못을 대하는 태도다. 인간의 품격은 잘못하지 않는 데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서 드러난다. 사과하고 책임지는 사람에게는 다시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말을 바꾸며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이런 행태를 '기획된 위선’이라고 부르고 싶다. 불리한 사실은 작게 만들고 유리한 부분은 크게 부풀린다. 비판이 나오면 약자의 이름을 꺼내고, 책임을 물으면 공익을 말한다. 특권을 지적하면 정치적 공세라고 한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명분을 갈아입는 것이다. 정치가 국민에게 신뢰를 잃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정치는 힘의 세계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힘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다수의 의석을 가졌다고 옳은 것도 아니며, 다수결로 법을 만든다고 모든 것이 정의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에는 자신들이 만든 규칙 안에 잘못을 집어넣으면 그 잘못까지 정당해진다고 믿는 허영심이 있다. 그러나 법으로 만들었다고 잘못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를 보라. 스포츠가 아름다운 것은 선수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엄격한 규칙이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반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승부가 공정하고 경기가 아름답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클수록 자기 절제가 커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 엄격한 기준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자격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는 후보자를 두고도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면 국민은 묻지 않을 수 없다.
능력이 있으면 염치는 없어도 되는가. 일을 잘할 것 같으면 도덕성 문제쯤은 덮어도 되는가. 국정운영에 필요하다면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장관 자리에 앉혀도 되는가.
오, 不 다!
그렇게 시작하면 다음에는 더 큰 잘못도 ‘국정운영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넘어갈 것이다.
국민이 화가 나는 것은 후보자에게 의혹이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만이 아니다. 그 의혹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가 더 화가 나는 것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잘못한 사람이 사과하면 알아듣는다. 억울한 사람이 해명하면 들어준다. 그러나 잘못이 보이는데도 아니라고 하고, 책임을 물으면 공익이라고 하고, 특권을 지적하면 약자를 말하고,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요구에는 국정운영을 들먹인다면 국민은 결국 묻지 않을 수 없다.
저 사람들에게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잘못하면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잘못하면 사과할 줄 알고, 자신의 이익 앞에서 한 번 더 멈출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도 위험하지만, 염치없는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일을 망칠 수 있지만, 염치를 잃은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고위공직자 검증은 철저해야 한다. 정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도, 사람을 망신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국가의 권한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자리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신이 아니다. 몰염치다.
국민은 묻고 있다. 그 자리가 그렇게 탐나는가를. 사람의 품격은 그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를 내려놓을 줄 아는 순간 드러난다. 결국, 공직에는 자리보다 먼저 염치가 있어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그 자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제라도 물어야 한다. 그 사람이 장관이 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장관이 되어도 괜찮은 사람이냐고. 그 질문에 국민이 납득할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밀어도 감투는 욕심일 뿐이다.
공직 후보자는 능력보다 먼저 염치가 있어야 한다.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ch25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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