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⑭] 오래된 통장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3-24 12: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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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통장
시인 한명숙


오래된 통장



한명숙


낡은 상자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오래된 통장들을 보았다
입금보다 출금이 더 많았던 신혼이었다 계동 한옥마을 처마가 내려앉은 마당 없는 집이었다 문간방에서 주인집 발소리에도 예민하게 울던 아이를 업고 달래다 보면 새벽이 왔다 바가지에 떠놓은 물은 꽝꽝 얼고 아이의 발가락도 시퍼렇게 얼었다 아무리 따뜻하게 가계부를 써도 마이너스 기온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많이 웃었다 눈물이 헤픈 것 보다 웃음이 헤픈 쪽을 택했다 가난했으므로 우린 서로의 벽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잔고가 없더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희망이라는 통장이 우리에겐 있었다

슬프다 말할 수도 울 수도 없던,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시절이 오래된 통장 속에 저축 되어 있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시 평론) 서랍을 열면 오래 간직한 ‘통장’ 하나쯤 있을 것이다. ‘통장’ 이 명사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의미는 알을 품고 부화를 기다리는 어미의 마음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한 개인의 시간과 꿈이 담긴 통장. 예술에서 사랑을 배제할 수 없듯 화폐는 세계의 중심에서 비켜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세계의 중심은 돈이라고 정의할 만큼 화폐의 구조는 거미줄 무늬를 이루고 있다. 경제의 빈곤은 교도소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본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는 화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가난을 주제로 하는 서사들을 많이 접해 왔다. 힘들지만 따뜻한 시, 오늘 만나는 한명숙 시인의 『오래된 통장』은 삶의 애환을 긍정적으로 들려주는 시이다. 이 『오래된 통장』에는 돈의 여정과 상실, 희망이 한 줄 한 줄 찍혀있다. 일기의 날짜를 적듯 찍힌 입출금 날짜와 그 시간의 희로애락이 담긴 통장.


통장을 펼치면 ‘아무리 따뜻하게 가계부를 써도 마이너스 기온은 올라가지 않았다’고 회고하는 시인은 ‘눈물이 헤픈 것보다 웃음이 헤픈 쪽을 택했다’고 말한다. 이어 ‘잔고가 없더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희망이라는 통장이 우리에겐 있었다’ 는 내용에서 돈의 욕망을 초월하고자 하는 긍정적 힘을 읽을 수 있다.

화폐의 흐름은 물물교환의 형태로 시작해 지금은 중앙 화폐가 디지털 자산으로 변화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처럼 화폐의 역사는 오랜 세월 인간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도 살아남아 가치를 형성하며 국가와 국가,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의 교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화폐에 대한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시점을 직시해 우리는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지 우려해 볼 일이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시절이 오래된 통장 속에 저축되어 있다’며 가난을 수용하는 시인은 통장의 입출금 흐름을 통해 돈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시절’이라는 문장에서 마음 먹먹해지는 시, 숱한 답청에도 파릇파릇 자라는 보리처럼 ‘헤픈 웃음’ 키우던, 시인의 희망이 담긴 시. 내면의 강한 의지가 녹음綠陰처럼 짙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품은 통장, 한 장 한 장 넘기는 소리가 머무는 곳. 그곳에 시인의 배추꽃 웃음 소란스럽기를 바란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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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Jacob님 2025-03-26 12:46:53
성공적 저축이나 투자는 현재가치와 미래가치의 변화를 제대로 읽는데서 시작된다. 중국 춘추시대의 고사 조삼모사(朝三暮四)는 도토리를 아침에 받으나 저녁에 받으나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원숭이를 비웃는 우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아침저녁을 내다 볼 수 없는 불확실성 시대에는 원숭이들의 선택을 따라야 이익이 된다. 재화의 시간가치(time value)를 생각한다면 아침에 도토리 3개 저녁에 4개를 받는 것보다는,
Jacob님 2025-03-26 12:51:45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받는 것이 보다 확실하고 가치도 커진다. 그 기간이 아침, 저녁이 아니고 3~40년이라면 가치의 차이가 막대하게 벌어진다. 가치도 커진다. 그 기간이 아침, 저녁이 아니고 3~40년이라면 가치의 차이가 막대하게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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