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⑨] 부부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3-07 12:32:52
  • -
  • +
  • 인쇄
부부
시인 함민복

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시 평론) 『말랑말랑한 힘』 4부에는 뻘에 관한 시가 여러 편 실려 있습니다. 시를 읽으며 작가는 부드러운 힘을 가진 시인이라 생각해 봅니다. 바다 냄새가 밴 시편들에 쓰인 사투리는 정감과 현장감이 물씬 느껴지지요. 글을 읽다 보면 손으로 뻘 반죽을 빚는 느낌이랄까요. 자연에서 찾은 소재들로 쓰인 『말랑말랑한 힘』은 묘사가 간결해 요즘 젊은 시인들 시처럼 복잡하고 어렵지 않습니다. 수사가 현란하지 않은 문장에 작가의 정서가 잘 빚어진 언어들은 독자들의 마음까지도 말랑말랑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함민복 시인의 글은 따뜻합니다. 그러나 이 따뜻함 속에는 경세를 염려하는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지요. 시집에 담긴 좋은 글들 많지만 오늘은 「부부」를 소개하려 해요.

부부 연을 맺고 사는 동안 우리 파랑을 겪으며 연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웨딩 반지를 끼웠다 빼는 일 반복하며 잃었을 부부의 첫 마음을 일깨우는 시. 「부부」는 함민복 시인이 이웃 청년의 주례를 서 주던 주례사를 시로 옮긴 내용이라고 합니다.


부부란 밥상을 혼자 드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삶의 고비를 ‘좁은 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할 때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하고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 ‘서로 높이도 조절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부인이 남편을 깍듯이 공경하다는 뜻이 담긴 거안제미가 떠오릅니다.

시인의 산문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한 아름에 들 수 없어 둘이 같이 들어야 하는 긴 상이 있다/ 오늘 팔을 뻗어 상을 같이 들어야 할 두 사람이 여기 있다/ 조심조심 씩씩하게 상을 맞들고 가야 할 그대들/ 상 위에는 상큼하고 푸른 봄나물만 놓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뜨거운 찌개 매운 음식 무거운 그릇도 올려질 것이다// 중략// 팔 힘이 아닌 마음으로 상을 같이 들고 간다면/ 어딘들, 무엇인들, 못 가겠는가, 못 가겠는가> 이 문장은 함민복 시인의 주례 내용 일부로 「부부」에 담기지 않은 부분입니다. 에세이에 담긴 내용 또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네요.

‘夫婦’, 한자의 뜻은 다르지만 동음인 ‘부부’의 발음은 부드럽습니다. 목화솜처럼 포근합니다. 맹자의 부부유별은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본분을 잘 헤아려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다고 해요. 부부란 보폭과 힘의 세기를 조율하며 발을 맞춰 걷는 사이, 이를 두고 수평적 관계라는 의미로 부부유별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말랑말랑한 힘』에 실린 「부부」를 소리 내어 가만가만 읽어봅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 비단 물결이 입니다. 봄 오는 소리 들리는 듯 밖이 소란스럽네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댓글 1

메킨타이어님 2025-03-13 19:01:18
평생을 약속한 사람과 함께하는 일상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견고하고 따뜻한 것 같습니다.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