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정용주
녹슨 철망
담 밑에 버려진 자전거
비스듬히 누워
자리를 조금씩 고정시켜갔다
타이어가 벗겨지고
톱니 사이 줄 끊어졌다
녹슬어가는 자전거
나팔꽃 한 줄기
꺾어진 핸들 위에
자주꽃을 피웠다
이슬에 맺힌 자전거
허공에 바퀴 굴리며
꽃을 배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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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화 작가 |
시인이 치악산의 흙담집에 은거하던 시절 그의 집을 방문한 적 있다. 산속에 들어와서도 ‘나는 늘 그리움에 진다’는 시인의 말, 그러나 굳이 그리움을 이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고 하던 담화가 떠오른다. 산속 생활 중 정리한 산문집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이 제목은 아이러니한 물음을 담고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이 설의적 질문은 낯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적 답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라는 시인 자신에게 던진 이 물음은 곧 행복의 이기심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지 않을까. 이렇듯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시인의 자리는 자연과 사람의 위치를 옮겨보거나 채움과 비움 사이에 여유를 앉히는 묘미가 있다. 나팔꽃이 필 때쯤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던 치악산의 여름.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꽃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넛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 주’ 김동환 시인의 「봄이 오면」, 이 노래가 봄마다 어김없이 흥얼거림으로 찾아온다. ‘내 마음도 함께 따가 주’라는 구절은 부르고 또 불러도 웃음이 배는 구절이다. 늘 그리움에 진다고 말한 시인도, 이 노래 가사처럼 자신의 마음 따가 줄 누군가를 은근히 기다려보지 않을까. 하지만 마음을 탐하는 대상은 꽃과 나비와 벌들뿐. 여름 무렵이면 치악산 높은 산마루에 앉아 펼쳐진 꽃들을 완상하며 지었을 정용주 시인의 「나팔꽃」.
올해는 나팔꽃이 게으른 나를 타고 올라 내 삶에 바퀴를 굴려주길 바란다. 저 춥고 더운, 곳마다 희망을 배달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 나팔꽃은 왜 밤에만 피는 것일까. 푸른 별빛의 소리를 듣기 위함일까. 여름밤 나팔꽃 옆에서 귀 기울여 봐야겠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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